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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리앗을 상대할 때

가까운 지인 가족과 따뜻한 시간을 보내다가
자연스레 기도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른들만 있으면 말씀 하나에도 기도할 수 있겠지만
네 명이나 되는 어린 아이들이 함께 있어서
맥락을 가지고 기도하는 게 좋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성경 구절을 쉬운 성경으로 읽었습니다.
 
“사울은 자기 옷을 다윗에게 입혀 주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의 머리에 놋투구를 씌워 주고,
몸에도 갑옷을 입혀 주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칼을 차고
몇 걸음 걸어 보았지만
투구와 갑옷이 거추장스러워서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했습니다.
“이 옷을 입고 갈 수 없습니다.
거추장스러워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다윗은 투구와 갑옷을 다 벗어 버렸습니다.
 
다윗은 막대기를 들었습니다.” (삼상17:38-40a)
 
골리앗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모욕했습니다.
어린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는
자신이 골리앗을 상대하겠다고 사울왕에게 나갔습니다.
사울왕은 말렸지만 다윗은 목동으로 사자와 곰에게서
어떻게 양들을 지켜냈으며
하나님이 어떻게 함께 하셨는지를 말합니다.
사울왕은 다윗을 허락하며 자신의 투구와 갑옷을 벗어 주었습니다.
 
‘왕의 투구와 갑옷’
전쟁에 긴요하게 사용할 수 있는 왕의 하사품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 그것들을 벗어둡니다.
골리앗을 상대하려면,
목숨이 위태로운 전장에는
이것저것 보험들이 필요하고 
아이템 하나가 아쉬울텐데
그저 자신에게 익숙한 막대기 하나를 들었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인생과 살아갈 인생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수많은 싸움 앞에서
사울의 투구와 갑옷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육아를 하게 되면 
이웃집 아이들의 사례와 교육을 비교할 것이고,
아이들이 자라게 되면 자신의 취업과 미래를 준비하며
싸움에 이기기 위해 내게 맞지 않는 투구를 쓰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내 몸에 맞지 않지만 갑옷을 입게 되면
싸움에 보다 유리할 거라는 마음이 생길테니까요.
우리 인생에 끊임없이 만나게 될 갑옷과 투구를 생각해 봅니다.
 
물론 앞으로의 거듭된 싸움에서 
다윗은 검술과 창을 연습하게 될 것이고,
새로운 전술과 전략도 배우게 되겠지요.
하지만 골리앗을 상대하는 이 중대한 싸움에서
그가 들었던 막대기를 주목하게 됩니다.
그래서 새해의 첫 걸음에
막대기를 놓고 기도하게 됩니다.
 
주님이 아시겠지요.
내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면
드문 기회와 값비싼 첨단 무기라고 할지라도 
거절하게 도와주세요.
큰 산과 같은 골리앗과 마주 대할 때도
주님이 내게 들려주신 막대기면 충분합니다.
 
 
#큰산같은어려움 #골리앗을상대할때 #보험과아이템이아니라 #왕의투구와갑옷을거절할수있을까 #익숙한막대기하나 #주님이함께하신다면 #막대기가줄수있는평강 #거절하는지혜 #가볍게전투할수있는분별

나의 등불

외국어 영역 답안을 체크하는 공란이 부족해서
마음이 어지러웠습니다.
문제지에서 몇 번을 확인하고는
막상  5번부터 답안지를 밀려서 작성했습니다.
다시 시작하기에는 이미 늦은 시간이라 
수능날 집으로 돌아오는데
마음이 어지러웠습니다.
 
나는 며칠 동안 집을 떠나 여행했습니다.
여행한다고 적어놓고 떠났지만
부모님은 며칠 동안 친구들을 수소문하며 걱정하셨지요.
어린 나이에 경험한 세상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 후 원치 않았던 대학에서 공부하다가
선생님이 되고 싶어서 다시 시험을 준비했는데
이번에는 신체검사에서 떨어져 선생님이 되지 못했습니다.
다시 원치 않았던 대학과 학과에서
마음을 붙이지 못한채 시간을 보냈습니다.
내 인생은 초반부터 이리저리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흔들린 인생을
이십 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흔들린 인생이 아프지만
그 아픔은 나를 만들어 주는 기초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흔들림이 가치 있으니
보약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흔들림은 아프고, 그것은 나를 짖이겨 놓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그 흔들림이 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패가 실패로 끝나면 우리는 숨 쉴 수 없겠지만
실패는 또 다른 길 일뿐입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인생은
지금 내 발 앞을 볼 수 있을 뿐
주변을 돌아볼 여유도 없고,
인생의 내일을 알 수도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돌아보면 오늘은
그저 수많은 길 중 하나였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윗의 삶은 쉽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이자 선지자인 
사무엘이 다윗의 동네에 찾아온 날,
그래서 온 동네가 떠들썩하게 잔치를 벌어진 날에도
다윗은 초대받지 못하고
들판에서 양을 지키는 막내였습니다.
꿈도 없고, 미래도 보이지 않은 그를
하나님은 주목하고 계셨습니다.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리이다” (시18:28)
아무도 알지 못 했던 다윗의 인생에
주님이 찾아와 주셔서
그의 인생에 등불을 밝혀 주셨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삼상16:7, 12)
스스로도 알지 못 했던 그의 인생의 계획을
주님을 알고 계셨습니다.
 
골리앗을 쓰러트리고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었지만
그의 인생은 쉽지 않았습니다.
절대주권자였던 왕으로부터 
끊임없는 위협을 당해야만 했고
그를 지켜주던 사람들은 
죽거나 위험에 처해야만 했습니다.
끊임없는 생명의 위협 앞에서도
그는 사울왕의 목숨을 지켜주거나 선의를 베풀었지만
세상은 자신의 의로움과 반대로 여전히 적대했습니다.
 
끝없이 흔들리는 다윗의 인생 속에서
그는 끊임없이 아파해야 했습니다.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시18:4-5)
 
사망의 줄, 불의의 창수,
스올의 줄, 사망의 올무..
이렇게 무거운 말들이
다윗의 삶을 묶고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전쟁 같은 인생입니다.
 
시편 18편은 그 모든 시간이 지난 후에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지은 시로 유명합니다.
성경의 시편 18편 앞에는 
이런 문장이 친절하게 적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전쟁 같은 삶, 전쟁 같은 인생을 마치고
수십 년이 지나 다윗은
자신의 시간을 돌아보며
시편 18편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다.” (시18:1-2)
 
그분이 우리 하나님, 우리 아버지 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만으로

주일 오후에 온유는
교회에서 ‘어와나 ‘라는 프로그램을 하고 있습니다.
마칠 시간에 맞추어 온유를 데리러 갔다가
멀리 앉아 있는 딸아이와 눈이 마주치자
사람들 몰래 하트를 보냈는데
그 찰나를 선생님 한 분이 사진으로 찍었나 봅니다.
사진을 받아보고 아내와 함께 배꼽이 빠지도록 마구 웃었습니다.
내가 저런 표정으로 딸을 바라보고 있는지는
나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와나에서는 매 주 말씀을 암송하는데
복습하는 단계라서 이번 주에는
말씀 9개를 암기해야 했습니다.
교회로 향하는 내내 차 안에 말씀이 가득했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며 여러 질문들이 생겼습니다.
시국과 관련된 대통령과 그 책임에 대한 답답함들,
여러 정치적인 심각한 문제를 너머
그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교회의 문제까지 함께 뉴스로 접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해 계속 질문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지만
왜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없는 선택을 해나가는 걸까요?
만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믿음의 걸음을 걸을 수 있는 것일까요?
 
현실에서뿐 아니라 성경에서도
수많은 경우를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뿐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대로
내가 이루게 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아브넬에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삼하3:9)
 
하나님이 하실 일을 내가 이루게 할 것이라는 이 말은
아브넬의 멋진 믿음을 드러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이스라엘의 군대 장관 아브넬이
자신의 치부를 지적한 그의 왕 이스보셋을 협박하는 말입니다.
다윗을 대적하던 적군조차도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현실속에서는 각자 자신들의 기득권을 따라
살아가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자칫, 정치적 이념이 신앙의 옷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하나님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았고
그가 왕으로 있을 때 통일 이스라엘은 놀라운 번영을 경험했지만
그는 무엇을 결정하고 어떻게 살아갔나요?
 
우리는 자주 기도합니다.
‘주님이 살아계신 것을 보여주세요.
주님의 마음을 보여주세요.’
하지만 주님이 당신을 드러내시고
그의 마음을 보이셨을 때
우리는 과연 그분의 마음을 따라 순종할 수 있을까요?
 
‘당신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저자인 유석경 전도사는 아버지가 직장암으로 돌아가실 때 
‘어떻게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 가능한가?’
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본인도  직장암으로 심각한 아픔 속에 있다가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게 가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품에 안기기 전까지도
그녀는 감사와 찬양을 멈추지 않고 말합니다.
 
“숨이 멈추고 단 한 번 숨을 들이쉬는 것조차 되지 않으니깐,
정말 나는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았다.
..아버지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시고
계속해서 진리의 말씀과 아버지의 사랑을 전할 수 있도록
하루하루 생명을 주시는 것이 너무나 감사하다.”
 
모든 것이 주어져도 그 분의 마음을 따라
살아가지 못할 것 같은데
모든 것이 결핍된 고통 속에서도
누군가는 그분의 사랑이면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딸을 향해 하트를 보내는 사진을 보며
당신의 자녀를 향한 주님의 마음을 생각합니다.
부족하고 부끄러워 내 마음은 간절하게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허락해 주세요.
말씀을 통해 그분의 길을 가르쳐 주세요.
그 길 위에서 온통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게 도와주세요.”

말과 글과 사진과 그림

나는 좋은 노래와 연주를 듣게 되면 마냥 좋았습니다.
그렇다고 노래를 잘 부르거나, 악기를 다루는 것이 부럽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각자의 은사라고만 여겼습니다.
하지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볼 때면 부러웠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있는 생각을 그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내가 적절하게 말할 수 있는 언어를 찾지 못해서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긴 시간에 걸쳐 내게 말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젯밤에 누워 주님의 하신 일을 찬찬히 생각해보니
정말 예측할 수 없는 계획과 방법과 시간이 있었습니다.

내가 전공한, 잘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없다고 얘기한 영역을 통해서,
적어도 한 번 이상 ‘나는 이 분야는 정말 할 수 없다.’ 고 말한
그것을 통해 주님은 일하셨습니다.
나는 은혜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벌써 10년이 넘게 사진 찍었지만
오늘 사진 찍는 자체가 내겐 감사의 제목입니다.
이젠 익숙해져서 밥 먹는 것처럼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라 말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색약이라지만, 색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나 대로의 색 감각을 가지고 사진을 찍고,
내게 보이는 데로의 색으로 사진 찍고, 그림을 그릴 뿐,
이것을 장애라고 생각해본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와 나누어 말할 수 없습니다.

“왕이신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을 찬양하겠습니다.
내가 날마다 주를 찬양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을 찬양하겠습니다.” (시145:1-2)
다윗은 왕이지만, 하나님을 왕으로 모십니다.
다윗이 왕이 된 이후에도 다윗은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기억합니다.

자신의 왕이신 하나님을, 다윗은 몇 번에 걸쳐 찬양하는데
특이할 부분은 다윗은 하나님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하나님과 관련될 때의 이름은 그 분의 거룩한 성품이나 사역등을 반영합니다.
결국 이 말은 자신에게 이루신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했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할 뿐 아니라,
자신의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만났고 이를 찬양했던 것입니다.

나는 가끔 에덴동산이 그립습니다.
거울을 대면하는 듯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그 사귐,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그 사귐이 어떤지가 궁금합니다.
창세기 2장은 하나님을 ‘여호와 하나님’이라 표현합니다.
하지만 창세기 3장에서는 창세기의 저자가 ‘여호와 하나님’이라 칭하는 반면에,
뱀과 여자와 남자는 ‘하나님’이라 칭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엘로힘’이라는 능력자, 심판자의 의미로 통칭적인 ‘신’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바알과 하나님 모두를 신으로 부를 수 있는 것 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능력자이면서도 우리와 친밀하게 관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 나와 관계 맺으시는 분을 뱀은 이간하여 갈라버렸습니다.
나와 하나님을 별개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선악과를 먹게 되면 그 능력자와 같은 능력자가 될 것이라 속삭이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에 대한 의존자가 아니라 자존자로 서는 순간,
우리는 변질 되는 것입니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말을 하고 있지만,
긴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감격할 수 있다면,
자격 없는 내게 주신 아버지의 선물인 것을 잊지 않는다면,
나는 정말 행복할 것입니다.

왕이신 하나님,
찬양받기 합당하신 주님과,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겠습니다.

“왕이신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을 찬양하겠습니다.
내가 날마다 주를 찬양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을 찬양하겠습니다.” (시145:1-2)

기드론 시내에서

원수 갚는 일은 주님께 속한 일입니다.
마음이 아플 때 주님의 십자가를 더욱 생각합니다.
구세주임를 증명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군중들 앞에서 아무 변명 없으신 주님을 생각합니다.
나의 정당함을 내려 놓는 일은
공의롭거나 정의로운 일을 해내는 일보다 힘든 일입니다.
멋진 일을 이루는데 주님께서 도우시는 것 뿐 아니라
나의 정당함을 포기하는 일에도 주님은 도우십니다.
정확하게 들여다 보면, 나의 정당함 따위는 애초부터 없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바울 조차도 죄인중의 괴수라고 말할 정도로
은혜를 알수록 내가 어떠한 사람인지 그 실체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에 쫓겨 기드론 시내를 통곡하며 건너 광야로 향했습니다.
맨발로 도망할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제사장 사독과 레위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고 피신하려 할 때
다윗은 사독에게 ‘하나님의 궤를 성으로 도로 메어 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성으로 돌려 보낸 후, 그는 맨발로 광야를 향합니다.

사울의 족속인 베냐민에 속한 시므이가 도망하는 다윗을 향해 저주했습니다.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다윗과 그 일행은 성경에서 찾기 힘들정도의 저주를 당합니다.
신하 아비새는 시므이의 머리를 벨 것을 다윗에게 청합니다.
그 때 다윗의 대답이 놀랍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한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삼하16:11)
다윗은 자신에게 부어지는 저주까지도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이해합니다.
시므이는 다윗과 일행이 도망하는 동안
산비탈을 타고 계속 따라오며 저주하고, 돌을 던지며 띠끌을 날렸습니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보시고,
오늘 그의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삼하16:12)
시므이를 단칼에 죽일 것을 청한 아비새에게 다윗이 덧붙인 말입니다.
왕궁에 있던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광야로 쫓겨 나왔을 때 하나님 앞에서의 다윗의 영성은 회복되었습니다.

삶의 일상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충동케 하는 수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이 일들이 우리의 부족함이든, 오해이든, 적대감이든
내 마음이 광야에 와닿을 때, 주님의 방법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문제에도 불구하고

내 책상 앞에는 몇가지 신념이 적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말한 것이 내가 아니라, 살아낸 것이 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내가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이 나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낸 것이 나를 말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가끔씩, 자주 이 말 앞에 나는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살아가면서 내 마음 먹은데로 움직여 지지 않는 것이 너무나 많음을 알게 됩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살아가며 조금씩 다윗의 심정을 알 것 같습니다.

자신의 장인, 사울왕에게 그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몇 십년을 쫓겨 다녀야 했습니다.
다윗은 엔게디 광야에서 사울의 목숨을 살려주었습니다.
사울이 굴에 있는 동안, 그는 한 칼에 해칠 수 있었지만
그저 옷자락만 벰으로 자신이 사울을 선대하는 것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바로 다음 페이지에서 나발과 다윗에 대한 기사를 말합니다.
양 털을 깍는 축제의 날에 다윗은 나발에게 먹을 것을 청합니다.
들에서 양을 칠 때 자신의 목숨을 지켜준 다윗을 선대하라고 종들은 부탁하지만
나발은 자신의 종들에게 다윗에 대해 이런식으로 조롱합니다.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삼상25:10)
나발은 분명 다윗이 누구인지 알고 있지만,
그는 다윗의 처지를 곡해하거나 폄하해버립니다.
마치 다윗이 사울밑에 복종하기 싫어서 도주한 것처럼 조롱합니다.
다윗은 엔게디 광야에서 자신의 목숨을 쫒는 사울을 살려주었지만
이번에는 자신의 수하들에게 ‘너희는 각기 칼을 차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려 애썼던 다윗이지만,
자신의 진실이 모욕을 당하거나, 훼손당했을 때는 분을 참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만
성경에 ‘특별히 하나님께 속했다’고 명시된 세 가지가 있습니다.
전쟁과 재판, 그리고 원수 갚는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대로 원수 갚으려던 찰나에
하나님은 지혜로운 여인, 아비가일을 돕는 자로 다윗에게 붙이셔서
피의 복수를 막으시고 실수를 모면케 하십니다.
“오늘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복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삼상25:33)

살아가며,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양을 따라 살고 싶은데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내 감정과 의지의 문제를 벗어날 때도 너무 많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아플적에 나는 이렇게 기도하곤 합니다.
“주님, 우리 가정의 가장으로 나를 삼으셨는데,
우리 아이들이 아픕니다.
내가 가장으로 그것을 책임지길 원합니다.
내가 온전히 서있지 못함으로 아이들이 연약합니다.
주님, 나를 긍휼히 여겨주세요.”
분명 모든 아픔들이 우리의 연약함과 직결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육체의 질병 뿐 아니라, 모든 문제들이 이와 무관하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아픔과 절망 중에도 주님으로 기뻐합니다.

내 마음대로 움직여 지지 않아서
나는 더욱 나를 신뢰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나를 신뢰하지 못하게 되면서
나는 더욱 주님을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문제가 없을 수는 없겠지만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이 주님을 바라보게 된다면
그 문제조차 내게 감사의 제목입니다.
문제가 일으키는 파고(波高)보다 주님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더욱 깊어지길 기도합니다.

회의론자, 이상주의자

나는 지독한 회의론자이며,
동시에 이상주의자입니다.
그래서 간혹 걷다가 멈칫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립니다.

그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뜻인지,
주님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는 명확지 않습니다.
검은색인지, 흰색인지 알 수 없는 회색지대에서
어떤 일을 결정할 때
기준으로 삼는 말씀들이 몇 개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결별하는 장면입니다.
롯이 택한 땅은 애굽땅과 같았고
여호와의 동산 같은 땅이었습니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선택해야 할 노른자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소돔과 고모라의 결말은 우리가 잘 아는 바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택한 땅을 주목해서 보게 됩니다.
무엇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내가 가진 생각과 판단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우선하는 선택의 기준은
이 일에 하나님은 어떤 마음일까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결정한 여러 선택들이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당혹스러운 것들입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미련해 보이는 일들이
시간이 지나 내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미천한 내 인생에 어떻게 개입하시는지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당장 믿음의 결정과 도약을 뛴다고 해서
눈앞에, 혹은 손에 잡히는 이익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결정과 도약을 주님은 잊지 않으십니다.
남편이 되었고, 아빠가 되었지만
우리 주님은 여전하십니다.
주님이 변하지 않았기에
믿음의 결정과 도약도 여전하길 두려운 마음을 품고 기도합니다.
믿음의 결정과 도약은
마음이 굳센 사람이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만한 사람이 하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오해합니다.
아닙니다.
결정과 도약을 한 사람은 얼마간
얼마나 마음이 두렵고 떨리며 흔들리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인생을 걸어가는 이유는
인생을 경영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믿음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결정 후에 망할 수도 있다는 것은
세상을 긍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너무도 냉혹해서 낭만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다윗을 자주 생각합니다.

사울 왕을 피해 다윗이 도망할 때
사람들은 다윗을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제대로 믿고 있었을까?
도저히 성취되지 않을 오랜 전설처럼 여기고 있진 않았을까?
피해 망상을 가진 절대 권력자는 다윗을 두려워했지만
사울왕의 수하를 비롯해서, 다윗의 추종자들까지
이성적인 판단을 가진 정상인이라면
다윗이 왕이 된다고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도망하며 겨우 자기 몸 추스르기도 힘든 도망자의 인생을
그렇게 상상한다는 것은
결론을 내다 보지 않으면 너무 많은 비약이 필요합니다.
나는 지독한 회의론자이지만,
누구보다 기뻐하며 이 길을 걸어가려 하는 이유는
절망 중에도 주님은 여전히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

이상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23:4)

기름부음 받은 다윗의 인생에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주님은 여전히 함께 하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울기를 기도

사울왕이 죽고, 다윗은 드디어 도망하던 시절을 마치게 됩니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은 몇 년간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다윗은 점점 강하여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해져 갔습니다. (삼하3:1)
그리고 결국 평화사절단으로 유다땅에 온 아브넬은 다윗과 평화협정을 맺게 됩니다.
사극을 통해 보게 되는 고려, 조선시대 뿐 아니라
현대 정치에서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무서운 정치보복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지금 다윗은 피흘리지 않고 평화적 통일을 이루게 될 놀라운 시점을 맞게 됩니다.
그런데 다윗의 가장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요압이 개인의 복수로 사절단으로 온 아브넬을 죽여버립니다.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 순간입니다.
아둘람에서 부터 다윗과 함께 해왔기에,
자신의 왕이 무엇을 바라고, 꿈꾸는지 가장 가까이서 봐왔지만
개인적 보복으로 나라를 궁지에 빠뜨립니다.

다윗이 무엇을 했느냐를 주목했습니다.
다윗은 적군의 장수인 아브넬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울었습니다.
그는 아브넬을 장사하고 소리를 높여 울었습니다.
그의 울음을 보고 온 백성은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의 한 바가 아닌 줄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삼하3:37)
다윗의 울음은 결국 평화적 통일왕국으로 이어졌습니다.
민중신학자 중에는 다윗이 너무나 정치적이어서
그의 울음을 통해 정치적 화합을 가져왔다고 평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정치적 화합을 가져왔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의 울음이 정치적 의도를 가졌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의 울음은 바로 아버지의 감동을 따라 순종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울기를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수많은 오해를 가지고
사람들을 정죄하기에 바쁜 우리 자신을 위해 우리는 울기로 했습니다.
한 영혼을 위해, 잃어버린 자를 위해, 믿는 우리를 위해 울기를 기도했습니다.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이들에게 부드러운 마음으로 이 눈물이 젖어들기를
그 눈물이 아픈 이들에게 위로가 되어주기를,

건설장에 심은 씨앗

점심에 사람들과 회의를 갖고 있는데
친한 선배으로부터 예배 중 말씀을 인도해줄 수 있겠느냐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어제, 건축중인 어느 건물에서 선배가 사람들과 몇 가지 논의를 하던 중에
술에 취한 사장님이 술김에 그럼 시작하는 의미로 ‘예배를 드리자’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생각이 났다며 부탁해왔습니다.
의지적으로 거절하지는 말아야 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내 머릿속은 수많은 생각으로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당장 몇 시간 뒤의 예배인데,
말씀도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술김의 약속이라 신뢰할 수도 없는데 꽤 먼 곳입니다.
거기가 어떤 공간인지, 누가 올지도 알 수 없습니다.
때마침 치통과 두통 때문에 진통제를 먹고
시름시름 앓고 있던 상황이라 옳게 분별하는것도 쉽지 않습니다.
‘주님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도망가진 않을게요.’

나는 어제까지 묵상하던 말씀을
주님앞에 올려 놓았습니다.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땅으로 가라.” (삼상22:5)
나는 어제도, 오늘도 이 말씀을 주목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왕을 피해 도망했습니다.
블레셋으로, 그리고 오늘 모압으로 도망했습니다.
모압은 자신의 조모 롯의 고향 땅입니다.
모압왕과도 타협점을 찾았기에 그 곳에 머무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울의 사정권 밖으로 피해 안전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선지자 갓을 통해 다윗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 안전해 보이는 땅 요새를 떠나서 유다 땅으로 가라.”

나는 이 말씀으로 주님께 질문하며 약속장소인 혜화로 향했습니다.
내가 도착한 곳은 건축이 진행중인 건물이었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오고가는 공사장 터에서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될지,
예배의 대상자는 인부가 될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더군다가 어제 자리에 없었던 건물주가 현장에 와있는데
불교신자라서 예배에 대해 부정적일 거란 의견이 오고갔습니다.
나는 어색하게 서서는 주변을 살피고만 있었습니다. 어떡해 해야 할지도 몰랐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인도해주시길 바랐습니다.

몇 차례의 혼선을 겪고 우리는 짧게 예배를 드리기로 했습니다.
제대로 앉지 못할 설계 사무실 같은 곳이라 모두가 둥그렇게 둘러섰습니다.
‘주님, 말씀을 바꿀까요?
이렇게 서있어야 하는데 다윗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신약의 몇 구절을 읽고 짧은 시간에 말씀을 나눌까요?’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지만
주님께서 지금까지 인도해주셨다면 나머지도 주신 감동을 따라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결과는 내가 책임질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직 성경을 모르는 이들을 전제로 다윗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의 인생은 알지 못해도, 골리앗과의 대치상황정도는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시작한 다윗의 이야기에 의외로 사람들은 예배에 몰입됨을 보게 되었습니다.
술김에 예배드리자는 말을 꺼낸 사장님만 초조해하고 불안해할 뿐,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주님께서 만지고 계심을 보게 되었습니다.
긴장했던 나도 서서히 감사함으로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불교신자라고 들었던 건물주는 나중에 알고보니 오래전에 온누리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 분이십니다.
그를 향해 축복하며 찬양하고 기도했을 때, 그의 눈가에 미소와 눈물이 보였습니다.
나는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 곳에 씨앗을 뿌렸습니다. 당신의 때에 열매 맺어주세요.”
우리는 그 열매가 어떠한 모양일지 알지 못하지만,
우리에게 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마음으로 씨를 뿌렸다는 사실입니다.

혜화역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치통과 두통 때문에 몸이 너무 피곤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휴. 집으로 돌아올 때는 타임머신처럼 생긴 곳에 편하게 누워서
슝. 하고 집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주님은, 이런 작은 목소리 하나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타임머신은 아니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선배가 운전하는 차의 뒷좌석에 누워서 돌아왔지요.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주님^^

노래하는 풍경 #34

만일 나의 모든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심각한 슬픔과
절망에 빠지게 될지언정

그 실패가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노래하는 풍경 #34]

p.s 다윗은 그의 수많은 시편에서
절망중에서도
주님의 인자와 진실을 노래합니다.

인자라고 번역한 이 말은
단순히 사랑이라는 말로
바꾸어 쓰기에 너무 강력합니다.
그것은 언약적 사랑으로 
영어성경에서는
정황에 따라서 unfailing love(실패하지 않는 사랑)와
같은 말로 번역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