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품꾼에게 품삯을 당일에 주어야 한다.
그가 형제이든, 혹은 외국인 근로자이든
그를 억울하게 대해서는 안된다.
품삯은 그에게 생명줄과 같다.
그래서 그가 여호와께 호소하면 그것이 내게 죄가 된다. (신24:14-15)
하나님은 내 하나님이시기 전에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내가 망하더라도 그들을 섬겨야 한다.
그러면 나는 망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섬겼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 이런 저런 법이 있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애굽에 종 되었던 때가 있었고
그 애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속량하신 일에 기인한다. (신24:18,22)
그것은 오늘날 내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용서에 관한 일을 생각할 때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은
상대자가 얼마나 사죄의 모습을 보이느냐, 용서할만한 가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속량하신 것처럼
주님이 나를 용서하신 일에 기인한다.
속량하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파다’라는 말인데
이는 값을 지불하거나 그에 상당한 대체물을 줌으로써 한 사람으로부터 다른 사암에게 소유권이 이전되는 것을 말한다.
내가 치러야 할 값을 예수님이 나무에 달려 저주 받으심으로, 피흘리심으로 속량하셨고
이제 내 소유는 사단에게서 주님께로 이전되었다.
여전히 내가 주인인 것처럼 살아가지만 내가 주님이라 부르는 고백속에
이제 나는 주인이 아닙니다. 나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라고 신앙고백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분이 내게 베풀어 주신 용서로,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이다. (마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