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아에 정신분열을 앓고 있는
창렬이는 작년 시월쯤에
혼자 교회에 찾아왔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힘들게 죽었잖아요.
근데 하나님은 모르는 척 하시는 거 같았어요.
나중에 영화보고 아닌 줄 알았지만..
그래도 예수님은 같은 하나님이니까 슬퍼하셨겠지만,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까지 아파해주시겠나 싶어요.
나도 강아지를 키우지만 굶어 죽지 말라고 밥은 줘도
아프다고 같이 아파하진 않거든요.”
“창렬아.
그 하나님이 너 때문에 죽으셨다더라.
너 때문에 지금도 우신다더라… 아니? ”
창렬이가 기도문을 받아 적었다.
가르쳐주는 대로 기도해 볼꺼라며 한마디 마디 꼭꼭 눌러 적었다.
혼자 있는 것 같아 두렵던 그 빈 공간에 그를 위해 함께 울고 계시는 그 하나님을,
그의 편에 서계시는 예수님을 그가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제 곧 성탄절이다.
“성탄절이라고 예수님께 축하드린단 말이 맞는 것 같아?”
또 한 친구가 물어온다.
생일이라면 축하하는 게 맞는 말이긴 한데,
결국 예수님은 우릴 위해
태어나셨으니
우리가 축하받아야하지 않을까?
하늘, 지극히 높으신 보좌에 앉으신 분이
낮고 낮은 베들레헴의
마구간
그것도 말구유에 나셨다.
죄 많은 인간을 대속해 죽기 위해..
죽기 위해 나셨다.
창렬이가 키우는 강아지와 비교할 사랑이 아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날은 결국 나를 위한, 창렬이를 위한, 우리 모두를 위한 날이다.
이게 바로 한 사람의 탄생을 전 인류가 기념하는 이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