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증도에 갔다가
아쉬움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태풍 볼라벤으로 증도의 십자가들이 넘어졌는데
그 중 얼마를 저희 교회에서 다시 세워주기로 했습니다.
상처들을 보수하는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아름다운 교회의 무너진 십자가를 세우기 위해
기초를 다지는 탑공사의 높이만해도 12m나 되었습니다.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는 데도 아찔했습니다.
저는 위에서 재난구호단의 숨소리를 사진으로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함께 아프지 않으면 그 아픔을 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카메라를 메고 십자가탑을 오르는데
바람에 실려 탑이 이리저리 휘청거렸습니다.
위로 오를수록 그들의 수고와 두려움을 함께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날 십자가가 세워지진 못해서
완성된 풍경을 다 담지 못하고 아쉽게 서울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이번에 교회에서 추수감사 사진전을 맡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매 해 절기헌금을 구제나 선교를 위해 사용하였는데
성도님들에게 사진을 통해 그 감동을 나누기 위함입니다.
서울로 돌아온 후에도 세워진 십자가를 사진으로 담지 못한게 아쉬웠나봅니다.
그래서 다시 증도로 떠났습니다.
계획은 해가 저물즈음 ‘화도교회’에서 촬영하는 것입니다.
푸른빛 하늘에 빛나는 십자가를 찍으려고 말입니다.
날이 어두워서 눈으로 보기에 캄캄한 하늘이어도
해진 후 30분 정도까지는 푸르른 하늘을 그려낼 수 있습니다.
사진은 빛을 예술이라고 합니다.
어둠 속에 셔터를 오랫동안 열어 두면
어둠은 시간이 지나도 어둠으로 남지만,
빛이 있다면 기다린 시간만큼 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네비게이션은
논두렁 한 가운데 우리를 멈춰 세워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날은 조금씩 어두워지는데 계획에 차질이 생겨서 마음이 자꾸만 급해졌습니다.
더이상 시간이 지체되면 아무리 노력해도 하늘을 푸르게 만들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계속 주님께 물으며
마을마다 불켜진 집들을 찾아다니며 화도교회로 가는 길을 물었습니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후에야 겨우 바른 길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관문인 노둣길에서 그만 발걸음을 멈춰야만 했습니다.
만조를 만나 지나야 할 길이 바닷물로 덮여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다는 노둣길은 좀처럼 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높았던 해수면이 다시 낮아져 길이 열릴 때까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하늘은 완전히 깜깜해졌고,
저 멀리서 아주 작은 십자가가 보였습니다.
바닷길이 열리고,
저 만치 보이는 작고 붉은 십자가 불빛 하나를 바라보며
느릿느릿 길을 찾아갔습니다.
날이 너무 어두워
계획한 느낌을 담을 수는 없었지만
(돌아오는 길에 ‘아름다운 교회’에 들러 사진전에 사용할 사진은 촬영했습니다.)
이 기다림속에 주님은 제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풀벌레 소리와 어둠이 짙게 깔린 시골길
네비게이션도 찾지 못하는,
바닷길로 막혀 들어가지도 못하던 캄캄한 이곳에
다시 세워진 십자가가 불 밝히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격스러웠습니다.
화도교회의 한쪽 벽면에 그림 하나가 그려져 있습니다.
노둣길마저 없을 당시에
돌로 징검다리를 놓아 섬을 오가는 여인의 뒷모습입니다.
이 여인의 이름은 문준경 전도사입니다.
매일 열 한 개의 섬을 나룻배로 다니며
복음을 전하다가 돌아가신 순교자입니다.
함께 아프지 않으면 그 아픔을 담지 못한다는 생각은
이 곳까지 오는 길이 힘겨워서인지
그녀의 삶으로 더욱 가슴에 와닿습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어리석은 생각은
착한 사람들은 유혹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거짓말이다.
유혹을 저항하는 사람들만이 그 유혹이 얼마나 강한가를 안다.
결국 항복해서가 아니라,
전투를 해 보아야 당신은 독일 군대가 얼마나 강한가를 알게 된다.
길에 눕는 대신에 바람을 대항하여 걸을 때,
당신은 그 바람의 위력을 감지할 수 있다.
오분 후에 유혹에 굴복하는 사람은
한 시간 후에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알 수가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나쁜 사람들은 나쁨(악한 것)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다.
그들은 항상 굴복함으로써 피난처 아래 사는 삶을 살아왔다.
진정으로 싸우기 전까지는 결코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악한 충동의 세력을 발견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 그 분은 유혹에 한 번도 굴복하거나 항복하지 않았던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분만이
유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온전하게 아시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는 유일한 온전한 실질주의자이다. “
(the only complete realist)
– C.S. Lew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