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편이 없는 싸움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변호사를 선임했다.
변호사는 총독 벨릭스의 구미에 맞게
바울을 고발했다.
 
로마 당국에게 소요사태를 일으키는 사람(행24:5)
전염병과 같은 사람이라 말한다.
지금까지 바울의 행적을 보면
이를 부인할 수 없다.
내가 나를 변호할 수 없을때
그래서 궁지에 몰릴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바울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기 편이 없는 곳,
일대다의 싸움. 그것도 전문적인 공격과
부인할 수 없는 고발앞에서
그는 의지할 대상이 한 분 밖에 없다.
그리고 그 한분 때문에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온 세상 날 버려도
주 예수 안 버린다는 사실이 주는 안도감.
내가 사망의 골짜기를 지날때에도
선한목자되신 그 분이 나와 함께 하심으로
그곳에서도 살 수 있다.

역사와 시간은 의도를 품고

성경의 인물들은 기다림과 물음이 있다.
특히 다윗의 인생이 그러하다.
언제까지 입니까? 
기름부음 받았지만 그는 연인 도망을 다녀야 했다.
하나님이 부재한듯한 이 시간속에서
다윗은 서른살이 왕이 되었다.
나는 어느 길을 걷는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가장 빠른 길로 인도하고 계셨다.
 
왕의 길과 전혀 다르지만
왕의 길을 예비하고 있는 바울도 
이와 비슷한 것 같다.
하나님은 그를 로마로 데려가길 뜻하셨다.
그리고 이제 바울 그 자신과는 무관하게
천부장과 총독등 로마의 관료들을 통해
그는 많은 병사들에게 호위를 받으며
넘겨지고 있다.
 
천부장은 총독 벨릭스에게 편지를 한다.
그가 실수한 부분은 서신에 담지 않은채
편집과 의도를 통해
단순하지만 선명하게 편지를 작성하고 전달한다.
이 편지가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울은 로마인이며 그는 죽을만한 사안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죽음의 위기에 처했지만
그는 죽을 죄목이 없다는 것을
천부장은, 그리고 누가는 지난 행적을 통해
끊임없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내게 무엇을 뜻하셨는가?
그렇다면 때로는 정치적이고 
우리 의도와 상관없는 주변의 상황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 이루시길 기도해야 한다.
그것이 왕이 되기 위한 길일수도.
로마에 복음을 전하고, 죽음에 이르는 길일수도.
일상 속에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일수도.
문제.같은 주변 상황이 주님의 부재를 말하지 않는다.
문제를 통해 주님은 무엇을 말씀하시길 원하시는가?

이름 모를 청년 한 명

대단한 컨퍼런스에 참석한 일이 있다.
나는 기질상 작은 테이블에 앉아 대기하고 있었는데
한 목사님과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대단한 목사님 한 분이 들어오셨는데
나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던 목사님은
나를 팽개치고 그 분에게 눈과 몸의 방향과 마음까지
쏟았다. 정말 쏟는 것 같았다.
자주 보는 풍경이었으니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힘있는 사람, 자신을 도와줄 사람에게
사람들은 온 정성을 쏟으며 자신을 어필한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던 시간이었다.
 
그런데, 역사속 많은 이야기에는
바울같은 사람 뿐 아니라 
그저 청년으로 기록된 사내들을 통해
역사의 흐름이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40명의 사람들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한, 스스로에게 저주의 맹세를 씌우면서까지
결연한 의지를 품은 무리들이 있었다. (행23:12-15)
지금이 아니라 당대에 그 정도의 의지를 가진
숫자가 모였다면
바울은 다음날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정상이지만
 
바울의 생질, 청년 한 사람이
이 모의를 알게 되고 바울과 백부장과 천부장을 
거쳐 이 사실을 알리게 된다.
결국 바울은 호위병 470명과 함께 가이사랴로 향하게 된다.

어찌된 전개인가?
알 수 없지만
내가 주목하는 몇 가지는.
이 흐름의 전개에는 이름모를 청년 한 명이 있다는 것과
이 사건이 있을 전 날,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행23:11)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지만
감사한 일은, 주님의 말씀이 우선이었다는 사실이다.
담대하라.
 
주님이 내게 두려워말라, 담대하라 말씀하시면
내일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말씀앞에 반응하리라.

선한 양심을 따라 살았다

“나는 오늘까지 모든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행22:1)

바울의 말에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에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했다.
바울의 말, 곧 선한 양심으로 살았다는 말은 무엇일까?
그는 사도행전에서 이미 본 것처럼, 그의 서신서에게
자신을 향해 말하는 것처럼
죄인이며 실수도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선한 양심을 따라 살았다는 말은
죄인이 아니라는 말도, 실수를 하지 않는다는 말도 아니다.
다만 실수를 했을 경우에
다시 선한 양심을 따라 다른 선택을 한다.

자신의 입을 치라고 한 사람이
대제사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 (행22:5)
대제사장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얼마전 한 회사의 CEO를 인터뷰했는데
그는 법과 가치와 규범을 이야기했다.
그것이 오래된 전통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하나의 기준이다.
기준이 없다면 혼란에 빠지게 된다.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의 사회 속에
기준으로 정해져 있는 권위 자체를
붕괴시켜 버리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예수님이라는 진리가 빛처럼 스며든 것이다.
그리고 그 빛을 기존 무리들은 철저하게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공회에서는
부활이 없다는 사두개인,
부활이 있다는 바리새인 사이에 분쟁이 생긴다.
이 무리들 속에도 각자의 기준이 있다.
기준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다만, 기준과 법이 진리라고 믿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혼란의 밤,
그날에도 고린도에서 바울에게 다가와
말씀하셨던 것처럼
주님은 바울에게 말씀하셨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행22:11)

주님이 길을 인도하신다.
잘 가고 있는 게 맞는가?
이 혼란속에 나는 과연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그 밤에 주님은 바울에게 그렇다고. 잘 가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눈에 보이는 현상이 나침반이 아니다.
주님이 나의 갈 길을 말씀하신다.

역사의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야

말씀이 중요하다 해서
말씀만을 집중하게 되면
메마르고 건조함을 느낀다.
그러면 기도와 영성을 강조하게 된다.
기도하고 기도하다보면
영적 체험을 하게 되는데
거기에 집중하게 되면
무엇인지 빈약한 기초를 느끼게 된다.
 
개인의 영성과 구원을 강조하다 보면
사회적 영성과 공동체와 사회정의에 대한
갈증을 느끼게 되고
반대도 마찬가지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쪽과 저쪽, 저쪽과 이쪽을 
두루 경험하며 한 쪽의 논리와 생각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세계의 아름다움과
힘의 균형들을 보게 되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님의 주권,
도대체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알 수 있을까?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바울이 가지고 있는 로마시민권은
매번 로마인으로 하여금
그의 신분를 보장받게 된다.
빌립보의 감옥에서와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에서도 그는 특별한
신분을 확인받게 된다.
 
마치 암행어사출두를 외칠 때
그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눈빛을
이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여기서 궁금한 점은
바울은 사건의 초기에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 타이밍은 항상 바울에게
가장 유리한 지점만은 아니었다.
손해 보지 않을 타이밍에
아이템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의 적절한 타이밍.
복음을 전하는데 문제 없을..
 
나의 정당함을 매번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니다.
바울에게 복음이 우선순위에 있었던 것처럼
내게는 무엇이 우선순위인가?

해서는 안되는 말의 내용과 상대

바울은 말해서는 안되는 
내용을, 말해서는 안되는 대상에게
말하고 말았다.
그것도 예루살렘이라는 장소에서.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찬동했던 바울이
이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방 사람에게 보낼 것이라는 말.(행22:20-21)
 
유대인에게 이방인들은
식사도 같이 하면 안될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가라고 말하는
예수님, 그리고 이제는 변절자인
바울을 이제는 가만히 둘 수 없는
유대인들 무리에게 바울은 말했다.
 
변하지 않을 이들에게
말하는 것까지가 
지금 바울에게 주어진 사명인가보다.
 
나는 너무 실용적이고 합리적으로
상황을 판단하려 드는 것은 아닌가?
이렇게 말하면
듣는 사람의 마음만 상할 뿐,
그리고 아무 변화는 없다는 말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아닌가?
 
바울은 최악의 장소에서
해서는 안되는 말을
해서는 안되는 상대에게
말하고 있다.

복음의 언어는 무엇인가

나는 같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부담스럽다.
혹, 앵무새가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같은 이야기가 아닌 다른 이야기가 없는게 아니다.
신대원 시절, 설교학 시간에 최고점수를 받았다.
새로운 말씀을 준비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가장 들려주고 싶은 메세지는 무엇일까?

내가 청년시절로 돌아간다면
가장 듣고 싶은, 혹은 필요한 이야기는 무엇일까?
방법론에 대한 이야기는 필요하지만
방법론이 유효하기 위해서 필요한 내용은 무엇일까?
 
두려운 세상,
하나님은 과연 나와 함께 하시는가?
그 하나님이 지금도 여전히 일하시는가?

하나님이 여전히 일하시는 분이시고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며
두려운 세상 보다 크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전제해야지, 그 다음 걸음을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적부터 예수님을 믿었지만
초, 중, 고, 대, 청년시절, 어쩌면 지금까지도
예수님을 믿었지만 
그래서 의인이지만 당연하게도 죄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 괴리감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바울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에 도착하고, 
결례를 행하자마자 
유대인들로 인해 소요가 발발하고 바울은 체포당했다.
그는 막사로 들어가기 전에 천부장 루시아에게 
연설할 기회를 요청하고,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님을 전한다. (행22:1-11)
 
흔히 복음만을 전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복음이 제한되고 한정된 단어의 나열을 열거하는 것으로
협소하지 않다.
나에게 복음은 무엇이며
그들에게 필요한 복음의 방식은 무엇인가?
복음은 변하지 않지만
이 시대 필요한 복음의 언어는 무엇일까?

막대한 비용을 대는 이유

바울은 네 사람의 정결예식 비용을 댔다.
나실인의 정결례는 상당히 큰 비용이 든다.
숫양 두 마리와 암양 한 마리, 소제물과 전제물..
바울이 이런 비용을 댄다면
유대인들은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의 오해를
거둘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쉽지 않다.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많아지면서
그들은 여전히 율법에 열심인 사람이기에
바울에게 오해를 가지고 있었다.
 
바울은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싶지만
해명한다고 이 문제가 
간단하게 풀어질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이방인은 유대인이 될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율법과 전통을
버려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 간단하지 않는 설명을 하는 대신,
교회 지도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바울은 정결예식의 비용을 대는 상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교회안에 이런 갈등과 오해가 얼마나 많은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다시 말하면 옳은 것을 택하기 위해
전심을 다하지만 결과적으로 양쪽이 피투성이가 된다.
주님의 마음이 무엇일까?
 
이 장면에서 바울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은
비본질에 대한 것이라면
자신이 대가지불을 해서라도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낮춘다.
물론, 이 일의 결과는 바울에게 위태로운
상황으로 흘러갔지만 말이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두로의 제자들,
가이사랴의 제자들,
그리고 아가보라는 선지자까지
바울에게 반복적으로 말한다.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가게 되면 당신은
고난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 가지 마십시오.” (행21:11-12)

성령님은 그들에게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해 
내다보게 했다.
하지만 그 일에 대한 판단은
둘로 나뉜다.
 
나는 은사를 가진 많은 이들을 만났다.
그리고 바울이 경험한 이 일을 
생각보다 많이 경험했다.
그래서 이 본문이 가지는 왜곡들을
잘 알고 있다.
 
문제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하나님은 부족한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 일하시기로 작정했다.
드러나 보이는 은사자가
모든 것을 판단해서는 안된다.
역설적인 상황은,
 
은사는 주신 감동을 그대로 믿어야 하지만
그것이 또한 정답은 아니다.
성령하나님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도구인 사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기준이 아니라면
내게 아무리 유익해 보이는 길이라도
분별이 필요하다.
 
바울에게 앞으로 일어날
고난과 핍박에 대한 예언은 
틀리지 않았지만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바울은 단순하게 결정했다.
주님의 마음을 따라 결정했다.
내 삶의 위태로움 앞에서
나는 무엇을 결정해야 하는가?
이쪽도, 저쪽도 답이 아니다.
주님의 인도하심과 음성이
답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기 때문이다.

너무 위험한 생각일까

#위험한생각 #내책임아니다 #이리떼와의싸움
“분명히 말하지만
여러분 가운데 누가 멸망에 빠진다 해도
그것은 내 책임이 아닙니다. ” (행20:26)

에베소 장로에게 바울이 말했다.
냉정하지 않은가?
몇 년을 함께 지낸 그들에게 
당신들이 멸망에 빠지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선을 그어야 하고, 구분이 필요하다.
내가 할 수 있는 몫이 있고
책임지지 못할 영역이 있다.
바울은 그들에게 헌신했다
하나님의 모든 뜻을 주저함 없이
그들에게 모두 전파했다. (행20:27)
이에 바울의 몫이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것은
바울의 몫이 아니다.
물론 휙 던져놓고, 받던지 말던지
그것은 내 소관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시대의 언어를 담고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미혹되지 않도록
전하는 것까지 바울의 몫이다.
 
하지만 그 이후는 그들의 몫이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전하라 말씀하신다.
다만 그들은 듣지 않을 것인데
그들을 돌이키는 것이 에스겔의 목적이 아니라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까지가
에스겔의 소명이다.
 
바울이 떠나면
교회는 흉악한 이리 떼가 교회로 들어올 것이다. (행20:29)
교회는 아무 싸움없이 평온한 상태의 목가적인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끊임없는 싸움이 있다.
하지만 주님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싸워 나가는 전쟁터와 같은 곳이다.
 
갈등없는 곳을 꿈꾸다 보니
가까이에는 갈등 없는 고상한 인격이 그리스도인의 완성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람은 여전히 부족하기에, 부족한 자와의 만남속에는
불협화음이 생기기 마련이다.
 
지금 시대는 갈등을 만들지 않기 위해
최적화되어 있다.
거리를 두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을 유지하다가
결국 첫 번째 강하게 부딪히는 시기가 결혼이다.
나의 고상한 인격을 사정없이 부딪히는 곳이
가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해하게 된다.
너 때문에 천사같은 내가 괴물이 되었다.
아니다, 원래 괴물이었지만 잘 숨겨왔던 것이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결혼하기 전에 공동체를 통해 
수없이 부짖히는 시기를 경험하는 것,
그것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가난한 존재인지
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라는 위험한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