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합한 자

이제 바울이 전면에 나섰다.
시간이 필요하다.
사람의 변화는 급박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변화라기 보다는 깨달음에 가깝다.
왜냐하면 오랜동안 사람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생각과 습관들을 바꾸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고 도움이 필요하다.
 
바나바의 도움을 받았고
그의 요청으로 안디옥에서 사역해왔던 그들이
이제는 새로운 사역을 시작했고
그 사역의 변화를 누가는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변화
아이들의 변화
공동체의 사람들..
우리에게 주어진 많은 이들의 변화는
말 그대로 시간이 필요하며 
품고 기다려 줄 사람이 필요하다.
 
자신의 신앙이 완고한
철저한 자기 논리로 무장한 사람과
며칠전 논쟁을 벌인 일이 있다.
그러다가 내가 뒤로 물러섰다.
싸움은 끝이 날 것 같지 않았고
만약 내가 이긴다고 하더라도
상대는 논리나 이야기에서 졌을 뿐
자신의 믿음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리 없기 때문이다.
이기고 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상대가 주님을 만나고, 주님 안에 변화되길 바란다면
차라리 시간이 필요하겠다 싶었다.
 
바울의 설교 중
다윗을 소개하는 문장으로
내 마음에 합한 자라는 표현이 나온다.
다윗을 보고 기뻤던 하나님.
그래서 그에게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게 하기 위해
기름을 붓는다.
하지만 그 당시 다윗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그는 그저 아무것도 내세울게 없는
가장 가까운 이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던 막내였다.
그랬던 그를 어떻게 주님은 주목하셨는가?
 
양을 치던 어린 목동.
그의 시간을 상상한다.
오답을 지워내자면
내가 가진 자격이나, 소유하고 있는 것들
사람들의 평판과 명예..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외모와는 다른 기준을 주님이 가지고 계신다.
특정하기는, 일상의 태도와 그의 마음의 방향이다.
일상의 태도, 곧 반응과 믿음에 관힌 이야기가 아닐까?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안디옥 교회는 예배드리며 
금식하는 일도 일상이었던 것 같다.
금식하던 때에 성령님은 사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워서 맡길 일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다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반응했다.
원어에는 ‘토테:바로 그때’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성령님의 말씀에 즉각 반응한 그들의 태도를 말하고 있다.
 
주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그 시간.
나는 바로 그때 주님 앞에 반응해야 하며
주님이 말씀하시는 시간은 흔히 내가 주님과의 
깊은 사귐의 시간이거나, 중요한 지점일때다.
그 일상의 때, 이 본문을 읽으며 
금식에 대한 마음을 생각한다.
 
워낙 자유로운 사고를 가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적인 감각을 절제함으로
삶을 단순한 형태로 바꾸고, 주님의 신호에
민감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중요한 지점에는
악한 영의 공격 또한 거세어 지기 때문이다.
 
구브로(키프로스)라는 섬에서
그는 그 땅을 통치하는 서기오바울을 만나게 된다.
그는 진리에 대한 사모함이 있는 사람이었고
그 지역의 선교전략에 주요 인물이기도 했다.
이에 바예수라 하는 유대마술사가 사역을 방해한다.
바울은 성령충만하여 그를 대적했다.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행13:11)
 
주의 손이 우리에게는 힘과 방패가 되지만
동시에 주의 손이 대적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주의 손이 우리에게 있을 때도 여전히 현실의 어려움이 있지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 (요16:33b)
승리는 오늘과 내일이 아니라,
이미와 아직의 문제이다.
결국 믿음의 문제이다.

실패가 아니라 과정이다

1. 로데의 이야기를 다룰 때
짝을 이루는 예화가 있다.
그리고 이런 패턴의 예상되는 결론은
어딘가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본문의 내용은 이렇다.
베드로가 탈옥 후
마가의 다락방 문을 두드렸을 때
사람들은 베드로가 살아 돌아왔다는
로데의 말을 믿지 않았다.(행12:15)
 
이 본문에 짝을 이루는 예화는
흉년에 비가 내리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우산을 가지고 온 사람은 아이 한 명 뿐이더라.
 
초대교회 성도들은
감옥에 갇힌 베드로를 위해 기도했다.
간절히 기도했지만 그가 마가다락방으로
정말 돌아올는지는 모르지 않았을까?
우리는 그들의 기도의 내용을 모를 뿐 아니라
주님이 이루실 뜻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상황에서 야고보는 죽임을 당했지 않은가?
나는 성경을 보고 이 상황의 결말까지 전지적시점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아직 경험치가 없는 사람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언젠가 하나님은 내게 가르치시셨다.
답과는 거리가 먼 자신만의 답을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치를 넘어간 이유로
더이상 그림 그리지 못하기에 틀렸다고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상황을 믿음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가혹하지 않은가?
그들은 이런 시간을 통해 배우게 된다.
강조점을 실패가 아닌 과정에 찍을 수 있다.
 
사도행전은 신화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당연하게도 교회 구성원의 불명예스러울 수 있는
이 상황을 적어 놓았다는 말은
전략적인 진술이라는 예상도 하게 만든다.
동시에 예수님이 죽으신 후 부활하셔서 사람들을 만나신 것처럼
예수님의 수제자이자, 교회의 수장이었던 베드로도
죽임 당한 후 그의 천사로 자신들을 방문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베드로의 기도로 중풍병자 애니아를 고쳤고
죽었던 도르가도 살아났을 정도로
그의 행적이 예수님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아직 신학적 토대가 만들어지지 않은 당시는
모든 것이 처음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기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쨋든, 다행스러운 것은
지금 우리의 모습을 투영하는 듯한
당시 초대교회의 성도들의 부족하고
불완전한 기도를 통해
주님은 당신의 일을 이루셨다는 사실이다.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순종하여 드리는 기도 마저도
주님이 받으시다.
그것은 믿음 없음을 꾸짖을 것이 아니라
실날같이 작은, 겨자씨 같은 믿음과 순종을 기뻐해야 할 일이다.
 
 
2. 세례요한, 야고보.. 하나님의 사람들을
여럿 죽인 헤롯은 결국 교만이 원인이 되어
주님이 치신다. (행12:23)
 
작은 유대땅 구석을 통치하는 왕은
자신이 마치 신이 된 것처럼 기고만장했다.
헤롯이 아니어도, 자기 동네의 골목대장이 되어도
기세가 하늘을 찌를 수 있다.
얼마전 행사에서 시의원들을 여럿 만났다.
충격적일만큼 사람을 무시하고
으시대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모든 옷을 벗은 후, 모든 타이틀을 벗은 후
우린 누구여야 하는가?
나는 누구여야 하는가?
 

탈옥에 성공했지만 이제는 수배자

인생에 풀 수 없는 문제들이 가득합니다.
하나님 언제까지 입니까?
우리의 인생은 어디를 향해 갑니까?
당신은 왜 무능력한 분처럼 침묵하십니까?
 
헤롯은 세례요한을 참수하고
야고보를 참수했습니다.
유대인들의 반응을 살핀 후 그들의 호응에
이제는 베드로까지 옥에 가두었습니다.
 
절대로 도망가지 못할 상황,
네 명이 한 조가 되어
네 개의 조가 베드로를 지키도록 했습니다.
절대로 풀지 못할 인생의 감옥.
 
예수님을 믿는데 그는 곤경에 빠졌으며
더더구나 교회의 수장이 내일이면 죽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기도와
주의 천사가 상황에 개입하여
그는 드라마틱하게 살아났습니다. (행12:1-12)
 
천사는 갇힌 베드로에게
“급히 일어나라”고 지시하고는 그의 탈옥을 이끕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셨다면
급히 일어날 게 뭔가요?
그냥 느긋하게 움직여도 되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그 상황에 구체적으로 지시하십니다.
우리의 만남, 일, 기다림. 이 모든 인도에는
그 분의 질서가 있습니다.
언제든 멈추고, 언제나 절제를 말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특별히 원하시는 주님의 때가 있습니다.
그 때를 놓치면 그 순간은 오지 않습니다.
 
오늘 새벽처럼 주님이 내게 ‘급히 일어나라.’ 말씀하시면
그 곳이 어디건, 죄 가운데 이건, 일 가운데 서건, 쉼 가운데 서건
우리는 일어나야만 합니다.
일상 속에 그런 시간이 쌓여야만
주님과 호흡하며 걸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내가 알지 못하는 지점에 있습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감사하게도 이제는 죽음. 그 두려움의 대상이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죽음 보다 크신 분, 죽음 보다 사랑하는 분이
그의 안에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리운 예수님앞에 얼굴과 얼굴로 만날 날을
고대하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하지만 오늘이 아니었습니다.
천사가 찾아온 날은 죽게 되었다고 생각한
바로 전 날 밤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시간을 알지 못합니다.
 
탈옥에 성공했으니
하나님이 그를 구했으니
이제 그는 두려움 없이 거리를 활보해도 되는 걸까요?
하나님이 일하시기에
우리는 아무 거리낌 없이 살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일하심에도 불구하고
야고보는 칼로 죽임 당했습니다.
베드로가 잡혔을 때처럼 야고보가 잡혔을 때
교회는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주님과의 동행이 나를 구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아침이면 수배자가 되어 피해다녀야 하며
여전히 생명의 위협이라는 현실 앞에서
믿음과의 교차점을 찾아 고민하며 걸어야 합니다.
 
탈옥에는 성공했지만
이제 그는 수배자가 되었습니다.
보니발 아내의 유혹에서 벗어났지만
그는 강간미수범이 되었습니다.
창을 열고 하루 세 번씩 기도했지만
사자굴에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인생은 알지 못하는 것 투성입니다.
여전히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믿음.
그 믿음에 반응할 뿐입니다.
그렇게 오늘을 살아갑니다.

성가신 바울, 그를 품는 조력자

1.
내게는 어느 시기이든
돕는 사람이 한 명씩은 있었다.
그래서 숨쉬기 힘들때에 
그들은 내가 숨쉴 수 있게 해주었다.
 
다윗은 혼자 걸어갈 수 없었다.
다윗을 돕기에 가장 부적합한 사람을 
한 명 꼽으라면 그는 사울왕의 아들, 요나단이었다.
차기 왕위 계승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가장 큰 조력자로써 그를 구했다.
 
바울을 중심으로 신약성경과 
예수님 이후 이방인 선교를 해석하지만
사실 바울은 아웃사이드였다.
그는 나중에 베드로를 향해서도, 마가와 바나바에게도
비난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을만큼
자기 노선과 주장이 확실한 사람이었다. (행15:39, 갈2:13)
 
안디옥 선교에 있어서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지만 조심스러울 수 있는 사람이 바울이었다.
그의 고향 다소를 찾아가 바울을 데리고 온 사람,
바울이 있기까지 그를 조력하고 함께 한 사람이 바나바다. (행11:25)
바나바와 바울이 안디옥에서 큰 무리를 가르친 결과,
비로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되었다. (행11:26)
 
2.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핍박받은 이들이
흩어져, 전도하여 만들어진 교회다.
핍박과 환난은 우리가 피하고 싶은 시간이다.
하지만 성경은 아이러니하게도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셨다”(행11:21)고 말하고 있다.
 
복은 무엇인가?
주님이 나와 함께 하는 것,
그것이 복이다.
문제는 여전하지만 주님이 함께 하신다면
이 시간을 감사해야만 한다.
 
아가보의 예언처럼 로마 전역에 심한 흉년이 들었다.
안디옥에 있는 제자들은 그의 힘대로
예루살렘을 도왔다. (행11:28-29)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을 돕기 위해
바나바를 도왔던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 안디옥이 예루살렘을 돕는다.
도움 받기 위해 도움을 주지 않았지만
마치 부메랑 같이 주님이 갚으셨다.
오늘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방인의 마가 다락방

언제 구원을 받았습니까?
나는 그것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이날입니다. ‘
라고 확정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존재일까?
동시에, 기억되는 지점들이 있어서 어느 지점이 구원 받았다고 말할
지점인지 알지 못한다.
 
예수님을 알았을 때인지,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신 분이신 것을 알았을 때인지,
죄인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달았을 때인지,
성령님을 인정한 이후 부터인지..
 
사마리아에서 사람들은 세례를 받았지만
제자들로부터 안수를 받고 난 후 성령을 받았다.
가이사랴에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해 증언할 때
고넬료를 포함한 이방인들은 성령을 받고 방언을 말하고 하나님을 높였다.
그 후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행10:47)
 
일반적으로 알려진 수순이 있겠지만
하나님은 그 수순을 따라 일하시지 않는다.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는 이 순간은
마치 마가 다락방의 사건과 닮아 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통한 당신의 구원사역이 있지만
동시에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이라는
당신의 뜻을 이루어 나가신다.
 
이들이 성령충만하게 된
베드로의 설교의 핵심은 무엇인가?
곧 예수님이 심판주인 동시에 구속자라는 사실이다.
믿는 자에게나 믿지 않는 자에게나
산 자에게나 죽은 자에게나 예수님은 재판장이며 심판주이시다. (행10:42)
동시에 그를 믿는 사람을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시대적인 언어와 눈높이를 맞춰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단순하며
삶의 규모와 가치들은 복잡 다단하며
순종해서 살아가는 삶의 형태는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방향은 단순하다.
 
내가 살아가는 이 하루,
누구 앞에 서있는가?
고넬료가 말한대로
“지금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있다” (행10:33)
그리고 그 분은 사람들이 판단하는
그 잣대, 외모로 우리를 보지 않는다. (행10:34)
주님 앞에 서 있는 나는,
그리고 내 마음의 방향은 어디를 향해 있는가?

하나님 앞에 서있다

1.
2007년. 그 이전부터
길을 걸으며 기도했다.
버스를 타고 행선지를 향할 때도
설거지를 하거나, 샤워를 할때도
마음이 가난해서 어찌할 수 없을때도
마음으로 기도했다.
그 기도를 통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내 마음의 방향이 주님을 향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고넬료는 베드로에게 듣기를 청하며
다 하나님 앞에 와있다고 말한다. (행10:33)
하나님의 하신 일을 들려주는 자리,
그 곳에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가 그 곳에 있기 때문이다.
 
거리마다
내게 익숙한 곳마다
내 일상에 드려진 모든 기도의 시간속에
주님의 임재가 그곳에 있다.
그래서 일상을 살아가지만
나는 하나님 앞에 서있는 것과 같다.
 
2.
둘은 한 사람이 될 수 없다.
게다가 한 사람으로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사람이 되는 신비.
주님 안에 가능하다고 말씀하신다.
 
베드로가 하나님께 순종해서
자신의 유대적 배경, 신앙적 가치, 신념앞에서
익숙한 것과 결별하였다면
 
고넬료는 하나님께 순종해서
로마군대의 장교로써의 권위를 피지배계층에게
엎드려 절함으로 기득권을 내려놓았다.
 
한 사람만의 순종만으로 이루어 질 수 없는 만남
곧 바울이 말한 바
그리스도의 피로 전에 멀리 있던
둘을 하나로 만드셔서 한 새사람,
하나의 새로운 사람을 이루신다.
 
순종과 그리스도의 피.
곧 은혜와 반응이다.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

1. 경건하고 하나님을 경외한 것은
밖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고넬료는 그 외적인 열매로써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였다. (행 10:2)
 
하나님은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바 되었다고 말씀하신다.
기도와 구제을 별개의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현이 기도로써,
이웃을 사랑하라는 표현이 구제로써 나타난 것이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어떤 하루를 살았던가?
 
(더더구나, 당시 모든 민족이 두려워 떨던 로마의 군인,
그것도 전략적 요충지, 가이사랴 장교 고넬료.
피지배계층을 향한 긍휼
아버지의 마음이 부어져야만 가능하다. 기도를 통해)
다시 아프리카를 향한 우물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다.
주님, 도와주세요.
 
 
2. 고넬료의 이야기는 교회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오랜시간동안 깨끗한 것과 속된 것에 대한 (레11)
전통 관습으로 자신을 지켜온 베드로의 생각을 깨뜨리기 위해
하나님은 세 번의 환상을 보여주신다.
이제 깨끗하고 속된 것의 구분은 관습이 아니라
주님의 주권 가운데 있음을 말해준다.
 
나는 무엇으로 거룩하고 속된 것을
깨끗하고 더러운 것을
하나님의 사역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가?
아합왕국에 있던 오바댜는
악한 왕조에 신하로 있었지만
비밀스럽게 여호와의 선지자 백 명을
굴에 숨겨 떡과 물로 그들을 돌보았다. (왕상18:13)
 
하나님은 에스겔 선자자에게
상징적으로 인분 불을 피우고 그것을 먹게 하였다.
에스겔의 부탁으로 쇠똥으로 인분을 대신하긴 했지만 (겔4:12,15)
상황과 상관없이 문자적으로 거룩과 속된 것을 해석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 판단은 주님께 속해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행10:15)

너의 솜씨를 기뻐한단다

“도르가는 옷을 잘 지었구나.
그래. 너는 그 일을 통해 나의 일을 하는구나.
성경에는 고아와 과부의 이야기가 끊어지지 않는단다.
구약의 저편에서 부터 
가까이에는 집사가 세워지는 순간과 도르가에 이르기까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들이 있단다.
너는 너가 할 수 없는 일들을 
내다보고 따라하거나,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네게 준 은사대로, 내가 네게 준 마음대로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것,
그것이면 나는 똑같이 기뻐한단다.
 

열등하다고 여기는 것은
너희의 세속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가치관 때문이지
결코 나의 가치 기준이 아니란다.
그래. 도르가는 옷을 잘 짓는구나.
과부들을 위해 만든 옷깃에 리본과 패턴이 참 아름답구나.
너의 그 솜씨를 보고 내가 웃는단다.
왜냐하면 너는 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기 때문이야.
내가 세상을 만들때의 솜씨의 부분 부분들이 네게 녹아있구나.”

 
때로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오고
때로는 바울과 같은 주님의 그릇이
역사속에서 크게 일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눈에 보이지 않은 작은 구석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만들어진다.
하나님의 나라를 물량공격으로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일상속 거룩함, 주님의 백성들을 삶을 
놓아버리게 된다.
 
주님이 우리의 중심이 되어야지
사역이 우리의 중심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 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물가운데, 불가운데 걸어갈 수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그 분이 내게 말씀하실 때
나는 가만히 아이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나는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않은채 
이유를 알지 못하는 시간동안 주님께 물어야 한다.

걸음마를 하고 자라나기까지

1. 시간은 상대적이다.
느리게 흘러가는
긴박한 시간속에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던
사울이 이제는 상황이 뒤바뀌어
유대인들의 살의앞에
사울은 광주리에 숨어 성벽을 내렸다. (행9:25)
복음으로 이제 그를 따르는
새로운 제자들이 생겼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지고 있다.
 
수많은 목숨의 위협앞에
그는 자신의 목숨을 아끼고 있지만
사실은 자신의 목숨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향후의 걸음, 복음의 기회를 살리고 있는 것이다.
긴박한 순간에 나의 행동이 이런 저런 목적이다라고
명확하게 구분지을 수 없다.
우리의 긴박한 순간에는
그저 본능으로 결정하고, 본능으로 움직이게 되기 때문이다.
 
다만, 그동안의 기도들,
그 기도는 우리 삶의 방향을 만든다.
그 기도의 방향을 따라 주님이 이끄신다.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시고
도울 사람을 붙여주시고
숨가빴던 시간이 다 흘러간 후에야
겨우 하나님의 은혜라고 대답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해서
긴박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 잘될거야. 라고 마냥 응원할 수 없는 것은
주님의 계획이 다르고, 사건을 치르고 난 후와 그때의 감정은
전혀 별개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켜보고 기도하고 위로하고
주님 바라보기를, 마치 처음 그렇게 하는 것처럼
주님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이다.
 
 
2. 사울은 이제 자신이 적대했던 제자들에게
손 내밀며 사귀기를 원했다. (행9:26)
사도행전 본문에는 언급하지 않지만
그의 서신서를 보면 사울은 아라비아와 다메섹을 거쳐
3년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사람은 복음으로 한 순간에 변할 수 있다.
동시에 사람의 변화는 시간이 필요하다.
사울에게도 적어도 3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눕고 기고 걸음마를 거치며 수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하며
겨우 한 사람이 되는 것처럼)
 
꽤 긴 시간이 흘렀지만
제자들은 사울과 사귀기를 두려워했다.
제자들조차 마음에 거리낌과 두려움이 있었다.
사울의 핍박은 실제적이었고
그 핍박을 직접적으로 당한 피해자들이
이들이거나 직간접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상처는 우리의 감정을 건드린다.
사람은 옳은 것을 따라 걷는 것이 아니라
옳다고 느껴지는 것을 따라 걷게 된다.
믿는 자들을 볼 때, 교회 지도자들을 볼 때
우리는 그들을 마치 성인으로 기대한다.
그 기대가 깨지면 전에 없던 실망을 하게 된다.
직분과 역할의 구분, 연약함을 품은 한 사람이다.
 
다만, 바나바에게 하나님은 그런 성품과 은혜를 주셨다.
사울은 공동체에 이어주는 다리,
화평하게 만드는 직분을 가진 자.
위로의아들, 바나바의 역할은
한 사람을 공동체 가운데 세워주는 일을 맡았다.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아니라, 드러나야 하는 사람을 드러내는 일
화려한 무대 위의 대단한 메세지를 가진 자 뿐 아니라
갈등하고 깨진 관계속에서 서로의 손을 잡아줄 수 있는 한 사람.
나는 오늘 누구의 바나바인가
 
 
3. 다소 출신 사울은
다소로 향했다. (행9)
자신이 알고 있고 믿고 있는 이 복된 소식을
다른 곳 보다 먼저 자신의 출신지에서 부터
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울이 예루살렘을 떠난 후 교회는 평안을 찾았다.
사울이 떠난 후 소란이 잦아들었던 때문일까?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율법에 능했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사울이
이제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어 예루살렘을
흔들어 놓고 떠났다는 사실이다.
사울의 행적을 보고 의문을 표했던 사람중
상당수가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갈등이 있지만, 문제 같아 보이는 그 갈등을 통해서
결국 주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