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침묵하십니까

하나님 언제까지 입니까?
언제까지 침묵하십니까?
악인들이 언제까지 노래부르도록 
내버려두시겠습니까?
 
성경은 현실을 담고 있다.
악인들의 환호앞에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그래서 나는 어린시절 이신론에 젖었다.
결국 내 힘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여기에 믿음의 결이 숨어 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이 땅에서의 승리를 위한 것인가?
부분적으로 모두를 부정할 수 없지만
예수님이 성육신하셨을때의 삶을 들여다보면
일부 답을 알수 있다.
 
승리는 이미 취했지만
그 승리의 방법과 절차는 우리의 생각과 같지 않다.
예수님 가까이의 제자들도 비슷한 모순에 빠졌고
두려웠고 도망했지 않은가?
 
악인들은 악한 일을 계속하며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는 보지 못한다. 야곱의 하나님은 생각하지 못한다.” (시94:7)
악인들의 말에 시편저자는 대답한다.
“귀를 지으신 분이 듣지 못하시겠느냐?
눈을 지으신 분이 보지 못하겠느냐?” (시94:9)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을 아시고

그런 생각들이 얼마나 헛된지도 다 아십니다.” (시94:11)
 
하나님은 보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시는가?
하나님은 인내하신다. 그 인내는 사랑으로 낳았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되면
우리는 침묵할 수 밖에 없다.
 
어쩌면, 고통은 계속되고, 아픔은 끊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제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아픔, 절망.
희철이 어머니는 내 기도에 울면서 
아멘이라 말했다.
절망이 있지만, 주님이 있어서 우리는 아멘.이라 말한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다.
하나님 언제까지 입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 분은 내 아버지시다.
누군가의 아픔, 누군가의 절망을 
진정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위로할 수 있는 한 분은
그 고통을 체휼하시고, 몸으로 짊어지신 한 분이시다.

 

큰 파도의 위엄앞에

해군으로 복무하며
1년여 시간동안 군함을 탔다.
길이가 100m가 넘는 커다란 배였고
함미에는 헬기가 뜨고 내릴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하지만 이 커다란 배가 큰 파도앞에서는 
작은 종이배처럼 이리 저리 휘청였고
우리는 벽에 기대어 지지대를 잡고 버티어 냈던 기억이 있다.

바다의 무서움, 자연의 무서움
그것보다 하나님의 일하심과 능력은 크다.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크니이다” (시93:4)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은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 지표가 된다.

세상은 양육강식처럼
서로를 물어뜯고, 목소리가 큰 사람,
돈이 많은 사람의 논리를 따라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세계를 통치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세상이 든든히 세워졌으니 흔들리지 않습니다. ” (시93:1)
세상을 다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을 보며
하나님의 부재함을 말할 수도 없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보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
주님을 바라봅니다.

영원히 찬양받으실 이름

사람들을 상담하거나 함께 예배를 드릴 때가
많은때 그때마다 조심하는 말이 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지금 예배를 드리고
기도한다고 해서 당장 형편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드리는 찬양과 감사와 예배가
우리가 하는 일을 보다 잘 풀어내기 위한
주술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뜻을 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리고 오늘 시편에서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형통케 하시는
분이심을, 그리고 악인의 길은
멸망의 길임을 역설한다.
 
“악인들은 풀같이 자라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하리이다” (시92:7)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성장하리로다.” (시92:12)

성경이 말하면, 나는 이 말씀 위에 서야한다.
마치 내 일상과 지금의 어려움 앞에
주님은 아무 관계 없는것처럼 여겨서는 안된다.
이 사안에 있어서 나는 최소한 시간이라는 관점을 생각해야만 한다.
 
당장 악인들은 성공하고, 흥왕할지라도
영원이라는 시간 앞에 서야한다.
의인 또한 같은 차원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이런 저런 논의보다 더 고민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나님이 나와 어떤 관계이신가를 묵상하는 것이
앞서 논의한 고민보다 더 중요한 문제이다.
 
주님,
주님은 내 아버지이시며, 내 신랑이시며
나의 왕이시며 나의 사랑이십니다.
내가 영원히 주님을 찬양합니다.

두려움을 이기는 힘은

부모는 자기 자식에게 적응한다.
온유와 소명이가 어렸을때 사람들이 이 아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물으면 나와 아내가 아이의 말을 통역했다.
그런데, 두 아이가 제법 자라고 나니
이웃집 어린 아이의 말을 알아듣기가 힘들다.
하지만 다시 아이들의 부모들은 이 말을 알아듣고 통역한다.
자녀의 말과 목소리의 높낮이, 손짓과 발짓, 눈빛이 어린 감정을 통해
부모는 그 아이의 심정들을 이해한다.
 
하나님이 내게 그렇게 바라보신다.
당신은 왜 내게 침묵하십니까? 라고 소리지르지만
내 언어가 아닌, 하나님의 언어에 나를 맞추어야 한다.
당신의 사랑이시며, 나를 향한 당신의 적응을 이해해야만 한다.
육신의 부모는 자녀와 함께 시간을 흘러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그 시점에서의 최선을 아이에게 반응할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육신의 부모와 비할바가 못된다.
 
날아오는 화살과 흑사병, 넘치는 재앙에 대해
시인은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시91:5-6)
내 곁에서 천 명이, 일 만명이 쓰러진다고 하더라도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시91:7)
두려움. 내게 두려움은 하나의 큰 키워드다.
두려움에 대처하는 방식을
성경은 눈을 감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두려움의 대상에서 눈을 돌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두려움의 대상을 직시하되
두려움보다 큰 이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두려움보다 큰 이가 내 아버지라면
아버지보다 힘없는 두려움은 나를 위협하지 못한다.
 
눈을 감는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의 대상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두려움과 싸울 수 있는 힘이 된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틀린 말은 없다 다만,

다윗은 이 성전을 짓는데
백성들과 각 가문의 지도자들에게
함께 동참하기를 요청한다.
부담스러울 수 있는 이 말 앞에
다윗은 자신이 얼마나 힘을 내어
여호와의 성전 만드는 일에 
수고하고 헌신했는지를 말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지도자들은
자원하여 즐거워함으로

자신의 것을 내놓았다. (대상29:6)

부담스러울 수 있는

이 일을 모두가 기뻐하면서 
할 수 있는 동력은 어디에 있는가?
물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그리 할 수 있다.
그리고 다윗의 헌신이 있었다.
 
많은 설교에서 신학적으로
옳지 않은 것을 배제하고 나면
틀린 말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성도들이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한 주가 지나가는 것은 무엇일까?
말씀이 말씀으로서만 그치는 원인은 무엇일까?
그 원인은 시대적 흐름과 사람들의 완악함도
있겠지만, 이 본문을 통해서도 추론할 수 있다.
 
아프리카에 우물을 만들기 위해
사람들에게 말했을 때,
나는 긴 시간동안 이 일을 준비했다.
그리고 많은 고민과 갈등이 있었다.
왜냐하면 현실세계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다윗은 말한다.
“이 성전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대상29:1)

많은 이들이 말한다.

이 사역은 하나님을 위한 일이다.
그리고 함께 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다 말한다.
하지만, 정말 하나님을 위한 일인가?
정말 하나님을 위한 일인지
사람들은 지켜보고 있다.
 
그래서 나는 늘 두렵고
늘 조심스럽다.
글 하나 올리는 것이 두려울정도로..
 
하나님의 성전을 지을 때,
다윗은 힘을 다하여 준비했다. (대상29:2)
자신의 보물을 말할때 ‘쎄굴라’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단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소유가 될 것이라
말할 때 사용되는 의미를 담은 말이다.
다윗의 마음이 이와같다.
목동이었던 다윗을 자신의 소유로 삼은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사모함으로
다윗은 자신의 소유였던 보물을 내놓는다.

진심을 담은 마지막 당부

마지막 당부는 
자신이 꼭 전하고픈 진심이 담겨 있는 말이다.
다윗은 백성들에게, 그리고 자신의 아들 솔로몬에게
마지막 당부를 남긴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시나니 
네가 만일 그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만일 네가 그를 버리면 그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대상28:9)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가?

하나님은 마음을 아시는 분이시다.
그저 예배를 드렸는지, 예배참석율이나
횟수와 헌금의 액수를 따져서 
한 사람의 신앙을 계수하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마음을 아신다.
만약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라면
그는 하나님을 만날 것이다.
얼마나 확신있는 말인가?
찾으면 만난다.
 
예수님도 동일하게 말씀하셨다.
찾는 이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
가장 좋은 것은 무엇인가?
내가 필요로 하는 것과 정말 내게 필요한 것은 차이가 있다.
그 분은 내 아버지이시며
지금 내가 만나는 모든 상황과 어려움까지도
그 분의 시각으로 이해하고 싶다.
 
찾는다면 주님은 나를 만나주신다.
하지만 과연 찾고자 하고 있는가?
만일 우리가 그를 버리면, 그도 영원히 버리신다.
 
얼마나 다행스런 말이며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주님은 나를 먼저 버리시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배불렀을때
더이상 부족한 게 없을 때
더이상 아쉬운 게 없을 때
 
우리는 그를 버린다.
그저 예배를 드려주고
나머지는 내 인생을 살게 되지 않는가?
솔로몬은 더이상 아쉬운게 없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동시에
수많은 신들을 섬기게 되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살지 않았다.
사람은 서서히 물든게 된다.
나는 그 앞에서 매일 결정해야만 한다.

환난중에 성전을 준비하는 다윗

사람들은 희망이 없다고 말하고
스스로도 꿈이 없다고 말하는  세대.
하지만 내 주변에 있는 아이들을 지켜보며
나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놀랍기만 하다.
 
방배동에 축구공을 들고 학교 오는 아이는
너뿐이라며 선생님이 포기했던 아이는
시간이 흘러 미국 ACT 상위 1% 이내의 성적을 얻게 되었다.
또 한 명은 스스로 꿈이 없다고 말했는데
하루 아침에 꿈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아끼던 장난감을 소명이에게 물려주라고 말했단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사람이 꿈을 갖고 자라나는 일은 
도무지 알 수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
다윗은 자신의 때에 성전을 짖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아들 솔로몬의 때에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마친다.
여유가 있어서 그 일을 한 것만이 아니다.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대상22:14)
금 10만 달란트, 은 100만 달란트 .. 그 밖에 수많은
재료들을 준비했다.
왜냐하면 다윗은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으며,
주님께 기름부음 받았다는 사실은
오직 은혜였다는 사실,
 
은혜는 가질 수 없는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온전한 선물이다.
그래서 다윗은 선물을 주신 분께
자신의 마음을 표현해서 힘껏 감사를 표한다.
 
결국 성전은 솔로몬에 의해 지어지지만,
다윗이 지은 것과 같다.
아이들이, 다음 세대가 이룰 하나님의 나라
나는 그들을 위해 무엇 할 수 있을까
어느새 40대를 살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내 인생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다윗이 광야에서 주님께 물었던 것 처럼
나 또한 두렵기도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주님께 기대는 것이다.

사랑과 공의의 교차점

오후에 잠시 틈을 내어 말씀을 묵상했다.
요즘은 정말 새벽부터 밤까지 정신이 없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함께 바쁘다. 
숨쉬듯 호흡하며 기도하기를 더욱 힘쓰고 있다.
 
다윗은 왕으로 통치하고 있을 때
두 가지 실수를 범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백성들에 대한 인구조사다.
요압의 보고를 비추어, 다윗은 군사로 동원할
사람들을 계수하라고 지시한 듯 하다.
 
이 본문을 통해 다윗은 관념적인 회개에서
바짝 엎드린 회개의 변화를 볼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해 친밀하다고 느끼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분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갔을 때
미처 알지 못했던 그 분의 정의앞에
우리는 숨조차 쉴 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에게는 긍휼이 있다.
다윗은 여전히 주님의 긍휼에 기대어 회개한다.
 
놀라운 사실은
다윗의 범죄를 통해 
단 몇 시간만에 7만 명이 전염병으로 쓰러졌다.
지금처럼 교통이 원활하지 않은 시대에
이렇게 사람들이 쓰러졌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사람들은 알게 된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한 사람의 지도자가 범죄함으로 가져다 주는 파급력을 보라.

이 진노가 멈춘 곳은 오르난의 타작마당이다.
사무엘하에서는 아라우나라고 표현한
이곳에서 다윗은 대가지불은 하고 이 땅을 구입하고
이곳에서 제사드린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의 진노가 멈춘 이곳에
여호와의 성전이 자리하게 된다.
인간의 범죄와 주님의 긍휼이 만나는 곳이다.
더더구나 이곳은 모리아산에서
아브라함에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던 곳이다.
이 곳은 주님의 언약, 주님이 앞으로 이루실 일들을
비추는 거울과 같은 곳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이 곳은 주님이 당신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이루신 곳이 된다.
 
그리고 내 마음에
주님이 찾아와 주셨다.
그리고 날마다 당신의 공의와 사랑을 경험한다.

큰 자들과의 싸움

도저히 넘지 못할 큰 산과 같은
존재들이 있다.
과연 넘을 수 있을까?
그 산 앞에 모두가 두려워 떨었다.
그때 작은 소년이 등장했다.
큰 산은 골리앗이었고 작은 소년은 다윗이었다.
다윗은 보기좋게 골리앗을 넘어뜨렸고
이스라엘은 그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
다윗은 왕이 되었다.
여전히 넘어서기 힘든 산들이 있었다.
골리앗의 아우를 포함한 큰 자들..
하지만 성경기자는 단 몇절로(대상20:4-8)
큰 산들이 우루루 너어지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시간과 약속과 때가 있다.
하나님께는 전쟁의 승리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승리가 어려운 때는
우리의 두려움도 한 몫 하지만 
주님의 의도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 인생에 광야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판교에서 마커스 콘서트가 열렸다.
나는 이 행사에 기록을 맡았다.
아침 일찍부터 바쁜 스케줄이었는데
기운이 다 소진되어 집에 돌아왔다.
여러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교회로 찾아오지 않을 것 같은 시대에
찬양이 울려퍼지는 판교의 중심지에서
나는 주님의 영광을 생각했고
사진을 찍으며 기도했고
집회가 마치고 기다렸다는듯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보고..
 
오늘도 이렇게 살았습니다.
라고. 이제 오늘을 안식할 수 있으려나..

요압만이 행동할 수 있다

요압을 통해 인생을 생각한다.
신앙의 모범이라 할 수 있는 다윗에게
요압은 늘 불편한 가시와도 같은 존재였다.
가장 가까이에서 그를 돕는 자이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여러 모반을 일삼은 자였다.
통일 이스라엘을 꿈꾸었던 시간에
요압은 자신의 개인적 복수를 단행함으로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기도 했다.
 
하지만 이 본문에서
요압은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연설한다.
“너는 힘을 내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힘을 내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상19:13)

암몬과 아람의 연합군 앞에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두려워 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의 일부, 단적인 모습을 
그 사람의 전부인것처럼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이 장면에서 요압은 다윗의 가시같은 존재가 아니다.
다윗 뿐 아니라 이스라엘에 꼭 필요한 존재이다.
그가 어떻게 변해갈지, 또 어떤 선택을 할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이 순간 요압만이 할 수 있는 선언과 행동앞에
박수를 보내야만 한다.
어떤 선입견도 내려 놓은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