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노래하는 풍경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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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드리는 것이 두려웠다.

내 삶이 내 것이라 생각했다.
언젠가는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되겠지만 내 삶은 결코 내 것이 아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내 것이 아닌 것이 얼마나 많은가.
현대의 사람들은 자기 시간을 빼앗기는 것에 분노한다.
하지만 그 시간조차도 내 것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시간 속에 종속되어 있다.
하지만 시간 속에 살기에 그 한계를 깨닫지도 못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내가 산 경험만으로 하나님을 해석하려 들지 말라.
사긴과 시간, 그 영원 너머까지도 주님께 속해있다.

[내가 노래하는 풍경 #10]

 

 

내가 노래하는 풍경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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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했을 때 낙심하지 않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은
흥왕했을 때 교만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노래하는 풍경 #9]

 

내가 노래하는 풍경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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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보면 믿음이 생기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들은 문제가 생겼을 때 걱정하지 않는가?
기적을 보거나, 경험하는 것과 믿는 것은 차이가 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보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초자연적 기적을 경험했다.
심지어 일용할 양식도 하나님께 그저 얻었다.
하지만 그들의 불신앙은 여전했고, 불평은 더해갔다.

집회를 통해 부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하지만,
어떤 기적이나 은사만을 구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감각적인 현상만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제한하는 것이다.

은사가 있지만 마음에 평강이 없는 사람도 많다.
주님조차 통제 못하는 고집 센 사람도 많다.

모든 행사를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비로소 그 은혜가 드러난다.
은사를 담을 그릇이 필요하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강력한 은혜를 구하라.
그것은 사랑이다.

[내가 노래하는 풍경 #8]

노래하는 풍경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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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후된 외국을 나가보면 
비로소 이른 밤을 알게 됩니다.

해가 지기 전에 
마을에 머무르던지, 
숙소로 돌아와야만 합니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로는 
집으로 돌아오기 힘들 정도로
칠흑 같은 어둠이 세상을 덮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삶을 알게 됩니다.
거칠고 노곤한 육체는 
밤을 통해 쉼을 얻습니다.

단순하다는 말이 거칠고 험하거나
피곤하다는 말의 언저리에 있는 말은 아닙니다.
단순하다는 말은 
나를 취하게 하는 것을 털어내고,
주님과 만나는 접촉면의 불순물을 
정돈한다는 의미와 가깝습니다.

한국으로, 일상으로 돌아오는 순간
풍요로움이 나를 안습니다.
온갖 단순하지 않는 요소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방해합니다.
선교지에서 만난 이들과 
오랜만에 만나서 이야기하다 보면
그때가 좋았다고 입을 모읍니다.

불편한 잠자리와 이동 수단, 
느린 인터넷 속도,
오후 5시면 문을 닫는 상점들..
도대체 거기가 더 좋을게 뭐란 말인가요?
더 좋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주님과의 친밀함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신 풍요로움이 
오히려 내 눈을 멀게 할까 
내 마음을 조심스레 살펴봅니다. 

[노래하는 풍경 #7]

 

 

내가 노래하는 풍경 #6

116

 

나를 닮고 싶다는 메일을 받았다.
사람들은 내가 가진 전체 중 극히 일부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나는 그들에게 외식(外飾)자이다.
그들은 나를 알지 못한다.

내 가장 가까이 있는 아내, 아이들에게
나는 어떤 존재인지?
만일 모두가 나를 부정(否定)해도
가장 가까운 한 사람이 긍정(肯定)한다면
나는 다행스러운 길을 걷고 있다.

[내가 노래하는 풍경 #6]

내가 노래하는 풍경 #5

115

결혼 후 나의 첫 변화는 쉼이었다.
지독한 일 중독자였던 때문에
내가 쉴 수 있는 명분, 혹은 주님의 말씀이 필요했다.

안식은 주님의 명령이다.

그것은 쉼이 재생산을 위한 휴식이라는
실용적인 관점을 뛰어넘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식은 영혼의 날인 동시에 육체의 날이기도 하다.

아브라함 헤셸은 <안식>에서
성경에서 ‘거룩함’이란 뜻을 지난 ‘카도쉬’라는 단어를 가지고
안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 세계의 역사에서 최초의 거룩한 대상은
창세기에서 창조 이야기가 끝나는 대목에서 처음 발견된다.
바로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것이다.
혜셸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공간이 없는 시간을 소유할 수는 있지만
시간이 없는 공간은 소유할 수 없다.
사람은 공간을 넘어서지만, 시간은 사람을 넘어선다.
시간이 창조의 과정이라면, 공간의 사물들은 창조의 결과물 일 뿐이기 때문이다.

유진피터슨은 이렇게 말한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을 도리가 없구나.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안식일을 지켜야겠구나.’

율법주의로의 회귀가 아니라
주님의 날을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시간 속의 거룩함을 생각하다 보면
마치 이 하루의 전체가 빛으로 둘러싸인 것 같단 생각을 하게 된다.

직선운동으로의 우선순위로써 주님과의 만남 이후,
별개의 나머지 일들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나선운동으로 주님은 모든 일의 중심에 서로 이어져 맞닿아 계신다.
마치 모빌에서 많은 이음새들이 그 중심축을 중심으로 조화롭게 움직이는 것처럼..

[내가 노래하는 풍경 #5]

내가 노래하는 풍경 #4

114

다윗은 헤브론 왕을 거쳐 이스라엘 왕이 된다.
여부스족의 난공불락 예루살렘 요새까지 정복했다.
모든 일을 정리하고 난 후,
그가 한 일은 법궤를 옮기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웃사가 죽게 되었고
그 마음에는 두려움이 가득하게 되었다.
과연 내가 하는 일이 옳은가?
하나님이 내게 기름 부으셨지만
사울 왕처럼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닌가?
하나님이 나를 왕으로 삼으신 일을 후회하고 계신 걸까?
하나님이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그에게 등을 돌리는 것 또한 한순간이다.
하지만 웃사가 죽고, 법궤를 머물게 한
오벧에돔의 집은 복을 받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삼하 6:11)

문제는 어디에서 잘못되었는가?
지난 잘못에 대해 회개하고
주님의 법도를 따르면 된다.
다윗은 사람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법궤를 옮기는 방식을 버렸다.
그것은 실용적이고, 효율적이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방식을 따라
다시 법궤를 옮겼다.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그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니” (대상15:13)

그는 다시 주님 안에 기뻐 춤추었다.
미갈의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했다. (삼하6:21)

[내가 노래하는 풍경 #4]

내가 노래하는 풍경 #3

113

과연 내가 할 몫은 어디까지인가?
중학교 때, 예수님이 기뻐하실 일을 한다고
온 길거리를 쏘다니며 쓰레기를 주웠다.
그렇게 몇 시간을 보내다가
나는 과연 이 일을 언제까지 해야 할지
좋은 의도로 시작했지만 갈수록 지쳐만 갔고
나는 밑을 알 수 없는 구덩이에 빠진 기분이었다.

성경은 내게 끝없는 숙제와 같았다.
한 예로 예수님은 ‘가장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행한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가장 작은 자는 누구이며,
그런 사람은 세상에 너무나 많은데
마치 온 길거리의 쓰레기만큼이나 많은데
도대체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그래서 나는 순종하는 것이 두려웠다.
시작했다가 중간에 발을 떼는 것보다는
아애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아서다.

그런데, 숲에 잘려 나간 나무를 보며, 살아가며 알게 되었다.
완전히 깨끗한 절단면이란 것은 없다.
나는 내가 사진을 찍으며
사랑의 대상으로서 사진을 찍는지,
기록의 대상으로 사진을 찍는지,
고민하는 한 달 간 사진 한 장을 못 찍을 만큼 심각해졌다.
하지만 한 달이 되던 날,
집 근처 흐르는 개천을 사진으로 찍은 후
마법의 봉인이 풀린 것처럼 다시 사진을 찍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깨닫게 되었다.
어떤 명확한 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답 보다 중요한 질문이 있다. 라는 것을.
너무 많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문제 있는 인생이 문제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문제없는 인생이 문제이다.
고민 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문제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고민과 문제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내 안에는 주님을 향한 순수한 열망뿐 아니라
수많은 욕망과 절망, 삶의 질척거림이 한데 얽혀 있다.

인생에 깨끗한 절단면이란 것은 없다.
완전히 깨끗한 사람도 없고,
완전히 절망인 사람도 없다.
그래서 완전한 기대도, 완전한 정죄도 있어서는 안된다.
오직 주님만이 완전하시다.

[내가 노래하는 풍경 #3]

내가 노래하는 풍경 #2

112

나를 두렵게 하는 수만 가지 두려움이나
내가 겪은 어떤 큰 고통도
나를 완전히 죽이지 못 했다.
오히려 그 시간은 나를 단련시켰다.

내가 아는 한,
가장 큰 고통을 경험한 욥조차도
고통으로 인한 파멸이 완전한 파멸을 의미하지 않았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욥의 고백처럼
나의 가는 길은 오직 주님이 아신다.
내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은 나를 두렵거나 고통하게 하지만,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신다는 사실은
고통 가운데서도 얼마나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지 모른다.

[내가 노래하는 풍경 #2]

내가 노래하는 풍경 #1

111

홀로 있는 시간을 어떻게 경영하느냐에 따라
내 마음의 여정(旅程)이 조성된다.

다윗은 이름 없는 막내에 불과했지만
선지자 사무엘에게 기름부음 받았다.
하지만 왕이 되기까지는 13-14년의 시간이 걸렸다.

수많은 환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한 번도 놓치지 않으셨다.
사울에 비해 다윗은 형편없는 스펙을 가졌지만
그는 지속적으로 마음을 조성했고
하나님은 그를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부르셨다.

[내가 노래하는 풍경 _ #1]

소설가 이승우는 <식물들의 사생활>에서
나무들은 구도자처럼 하늘만 우러르며 고요하게 서있지만
그 내면에서 들끓고 있는 욕망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의 글 앞에 얼마나 많은 울음을 쏟아야 했는지 모릅니다.
천만 개의 욕망의 뿌리들 속에서
하나님이 내 마음에 던지시는 선언적인 메세지들이 있습니다.

내 일기장에는 여러 제목들이 붙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내가 노래하는 풍경’입니다.

길을 걷다가
‘나는 이렇게 걸어야 하겠다.’
문득문득 내 마음에 적어 놓은 말입니다.
자신에게 한 말이라 친절한 것도, 완전한 문장도 아닙니다.
벌써 작년부터 구식 타자기를 사다가,
이 말들을 타공하여 내 마음에 새겨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일 년이 지나도록 타자기가 마련되진 않았지만
나는 여전히 길을 걸으며 걸어야 할 방향을 의심하며 문장을 만들어 갑니다.
그래서 이 공간(내가 노래하는 풍경)은 내 마음이 서성이는 지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