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은 꽤 논리적인 작업이다.
순서대로 긍정하다 보면
내가 서있는 곳이
진리인 것처럼
생각되지만
잘못된 전제나
가정 몇 개만으로도
우리는 불의하거나
멸망에 빠질 수 있다.
당시 거짓 선지자들의 말에
그들은 취하게 되었고
함께 연회 할 때에 (벧후2:13)
당시 초대교회서
성만찬을 할 때
그들은 즐기고 놀며
취하여 음란하여
성적 무절제의 시간을
가졌다고 추정할 수 있다.
믿음의 걸음을 걷다가
믿음의 말을 하다가
주변을 돌아보면
마치 하나님께 헌신하느라
자신은 억울한 인생을
살아간 것만 같다는
고민을 이야기한다.
무엇과, 누구와
비교하느냐의 문제가 있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정말 억울하고 비루한 인생을
살았느냐는 것이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함께 찬양했지만
구속한 주가 보이지 않으면
온통 세상과 나만 가득하게 된다.
그때 우리는 듣게 된다.
자유를 준다는 말을.
논리적인 과정 속에서
사람들과 세상은 약속하지만
이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이다.(벧후2:19)
언젠가 하나님은 당신의 아픔을
전해주셨다.
지킬 수 없는 약속,
책임질 수 없는 약속으로
사람들을 미혹해서 새로운 지도를
만들어 걷게 만들지만
결국 그 길의 끝에 섰을 때의 비참함에 대해..
성격은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이야기한다.
나는 오늘 무엇에 연단되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