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상주의자로 살았을 것 같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내 인생을 밀어내면 어느 정도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책임의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무리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대가지불이 필요하고, 누군가는 눈물 흘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결혼이 두려웠다.
주님의 약속을 믿고 결혼하고, 하나님은 매일 나를 가르치셨다.
워커홀릭이었던 내게 안식을 가르치셨고
생각했던 것보다 세상은 내 마음 같지 않으며
아이들이 자라나는 시간을 통해 씨를 뿌리는 것과
그 과정이 머릿속 상상과는 다르다는 것도,
대가지불이라는 것이 그리 녹록치 않다는 것을
하나님이 책임지신다고 말씀하셨지만 거기는 믿음이 필요하고
동시에 기도한다고 생겨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부지런히 땀흘리고, 수고하고 근심한 후
시간이 지났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흔적과 은혜를
알수 있게 된다는 것을,
어릴적 내가 믿은 신앙은 어떤 면에서 이신론이었던 것 같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답을 내릴 수 없지만 나는 다윗을 통해 그 분을 상상할 때가 많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기름부으셨지만
그는 목숨을 지키기 위해 아비멜렉 앞에서 침을 흘리고
벽을 그적거리고, 굴에 숨어서 노래 불렀다.
그런데 그 노래는 열방을 대신한 찬양이었다.
여기에 믿는 자의 역설이 있다.
오늘 새벽, 빚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과 나눔이 있었다.
보편적이고, 일반적으로 필요한 내용인 것을 잘 알지만
내 안에 문득 이유를 알 수 없는 갈증이 있었다.
예수님을 믿는 이는 고상한 인격의 문제 없는 경제규모를
꾸려 나가야 하는 것일까?
최근 결혼에 대한 강의를 하게 되면 청년들에게 이야기한다.
결혼 하는 목적이 누군가보다 더 멀리 가기 위함,
더 높이 올라서기 위함인가?
믿음으로 살아가다가 때로는 빚더미에 앉을 수도 있다고 본다.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시간속에
하늘에 뿌리는 씨앗이 될 수도 있다.
하나님 나라를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보화가 밭에 숨겨져 있는데, 모든 재산을 팔아 그 밭을 산다고 말한다.
그 보화는 정말 보화지만, 내가 만질수도,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짐엘리엇이 아우카족에 죽임당했을 때
뉴스는 그를 향해 얼마나 소모적인 죽임인가라고 되물었다.
과연 그런가? 누구의 삶도 우리는 다 알지 못하며
우리는 알곡과 가라지를 분간할 수 없으며
누가 바울이 되는 사울인지, 누가 애굽의 바로인지 알 수 없다.
답 없는 질문들이 끝이 없다.
그래서 내가 논문을 이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아닐까
스스로 내가 쓰는 글을 반박할만한 백가지도 넘는 생각이
마음에 가득하기 때문은 아닐까?
질문의 답은 언젠가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조금씩 살아가며 알게 될 것이다.
세상을 향한 관심을 조금 좁히고, 나를 향한 주님의 마음에 집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