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극적으로 서야 합니다. / 신 22:22-30>
나를 순결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은 어떤 것들이 있나요?
고대 근동지방에서의 성문화에 성경은 적극적으로 맞섭니다.
성적 문란함에 대해 성경은 철저하게 자신을 지킬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간음을 마치 사람이 누군가를 죽이는 살인과 같은 무게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간음을 범한 남자와 여자 둘 다를 죽이도록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자의 경우, 성읍에서 강간했을 경우와 들에서 강간했을 경우를 나누고 있습니다.(신22:23-25)
이는 성읍에서는 여자가 소리 질렀을 경우 누군가의 도움을 구할 수 있었지만
자신이 적극적으로 순결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반면에 들에서는 소리질러도 도와줄 사람이 없었기에 정상참작이 된 것입니다.
성경은 결혼한 여자를 말할 때
약혼한 여자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약혼을 하고 1년 동안은 함께 살거나 잠자리를 같이 할 수는 없었지만
약혼은 이미 결혼의 구속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에게 찾아와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말을 했을 때 마리아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 질것입니다.” (눅1:38)
당시의 사회 문화속에 그의 임신은 죽음과 동일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영화나 TV, CF등의 미디어를 통해
이미 우리나라에는 불륜과 음란한 성문화가 가득합니다.
사랑의 감정이 있으면 육체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로맨스와 사랑에 대한 개념들이 어디서 어떻게 해석되었는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결혼이라는 놀라운 언약 앞에 또 다른 사랑들은 범죄행위입니다.
하나님의 법 앞에 서있으면 그것은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내가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물론 사랑할만한 구석이 있어서 사랑하겠지만
가장 일차원적인 것은 내 아내이기 때문입니다.
설사 아내에게 치명적인 흠들이 발견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나를 아프게 하고, 지치게 하고, 힘들게 하겠지만
내가 아내를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그가 내 아내이기 때문입니다.
성에 대한 문제로 교회안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그저 율법적으로 판단하고 정죄할 문제도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존재론적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삼손에게서도, 다윗에게서도.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인생의 선배들이 그렇게 수없이 넘어지는 일이라면
그것은 쉽지 않은 문제이며, 저 또한 평생에 걸쳐 싸워나가야 할 일들입니다.
문제를 일으킨 사람과 나는 다른 부류라고 생각하는 순간, 사람은 넘어집니다.
몇 달 전,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가졌습니다.
참석한 형제들과 긴 시간 나눔을 가지며 더욱 확신한 것은
결혼한 사람들 조차도 성에 대해 자유롭지 못하구나.
특히 남자는 더 심각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모든 외식적인 겉모양들을 뜯어내고
나를 보게 되면 그 때에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드러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