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적인 회심은 시사점이 될 수 있고, 감동의 포인트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단지 그것 뿐이다.
그래서 나는 전체 삶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사람은 감정의 지배 또한 받는 존재라,
감정의 어떠함에 따라 탁월한, 또는 대단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특히 청년의 때에 그것에 지배를 많이 받게 된다.
내가 연작으로 다루었던 ‘요셉일기’가 그런 부분을 다룬 작업 일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인내로써 구원을 이루는 게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인내로써 구원을 이루는 것은
내가 옛적, 생각했던 구원의 모양 보다 더 수고스러운 시간을 필요로 했다.
열정은 감동으로 이어지기가 쉽다.
열정으로 치자면 청년들을 이길 수 없다.
열정이 빠진 청년은 바람 빠진 풍선과도 같다.
청년은 그 뜨거운 열정으로 하늘 끝까지 풍선을 타고 올라야 한다.
때론 이리 저리 부는 바람에 따라, 이쪽 저쪽으로 치우쳐 보기도 하지만
풍선이 결국 하늘을 향할 때
어떠한 모양이든 그들의 진정성이 담겨 있고 그것은 감동을 나눈다.
하지만 신앙의 완성은 젊은 때의 한 단편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신념을 위해, 신앙을 위해, 꿈을 위해 자신의 한 몸을 던질 수도 있지만,
작은 유혹과 상처과 관계 때문에 신념이나 믿음까지도 포기해 버리는 것을 자주 보았다.
나이가 들면, 책임져야 할 짐들이 늘어난다.
청년의 때, 열정을 마음껏 표출 할 수 있는 것도
어쩌면 단신의 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나이를 먹어 갈 수록,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모른다.
그의 그림자에는 가족에 대한 책임이 어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고집과 틀 또한 자라나는 것이다.
인내로써, 구원을 이룬다는 것.
청년의 때,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였던 것 처럼,
나의 가는 길을 다 간 후에도 똑같이 주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이면 되지 않을까.
그것이 나의 신앙의 영역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전 생애를 걸쳐, 나의 그림자까지 덮고 있는 그 분의 간섭하심을 맛볼 수 있다면..
삶은 그리 녹록치가 못하다.
아내는 며칠전부터 오늘, 오후가 다 갈 때까지도 아파하고 있다.
(때론 키득키득 웃으면서 아파하고 있다.)
하늘의 시민권자인데(빌3:20) 이렇게 아파도 될까.
여전히 눈물이 있고, 고난까지 있다.
그러면서 삶과 신앙의 규모가 생기는 것이다.
신앙의 본질을 어떻게 삶 속에 녹여낼 것인가. 고민하는 것이다.
절망 가운데서도, 이 모든 상황을 지배하시는 하나님과,
모든 것 위에 능력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과
우리의 연약하심을 도우시는 성령하나님의 그 사랑을 선포해 가며.. 말이다..
p.s 아내는 참 감사하고 있다.
적절한 타이밍에 회사를 쉬게 된 것도,
침대에서 꼼짝도 못하고 있지만 따사로운 햇볕, 그 즐거운 한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