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820m의 고지대인 예루살렘에서 출발해서
유대광야가 끝나는 지점인 해발 – 395m에 위치한 이 곳 여리고에 도착했다.
여리고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도시이다.
이런 고도차를 자동차로 달려서 이동하는데 겨우 40여분이면 충분하다.
이 곳에 있는 텔 여리고라는 이름의 고고학 발굴지는
약 7000년 전에 건설된 곳으로
여리고는 세계에서 가장 낮고도 가장 오래된 도시로 남아있다.
이 오래된 도시 여리고는 성경에서 종려의 성읍이라고도 불렸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서 처음으로 점령한 성읍으로
7 일 동안 성을 돌고 고함을 질러 무너뜨린 여리고성 싸움으로 유명하다.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께서 이 곳에서 소경 바디매오를 고치셨고 삭개오를
만나셨던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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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묵고 있던 숙소 창가로 아침 햇살이 비쳐왔다.
해 돋는 방향으로는 요단강이 있으며
그 곳에서 약속의 땅, 첫 관문인 이 곳 여리고로 입성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생각했다.
그들은 출애굽 때 홍해의 마른 땅을 밟고 건너온 것처럼
하나님의 열심을 따라 갈라진 요단강을 건너 여기로 왔다.
여호수아서는 애굽에서 넘어온 이스라엘의 두 번째 세대가
고대하던 약속의 땅을 밟을 기대와 두려움으로 시작되고 있다.
가나안은 첫 번째 세대가 증언한 것처럼 두려워 할 땅이었다.
그것은 사실이다. 신장이 장대했으며 성읍은 견고했다.
믿음직하고 경험많은 민족지도자 모세는 이미 죽었고
이스라엘을 이끌 신출내기 지도자인 여호수아는 두려워 떨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모세의 시종으로 긴 시간을 함께 했던 그는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을 것이다.
과연 이 불평많은 백성을 잘 이끌 수 있을까? 약속의 땅을 차지할 수 있을까?
그 때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할 것이다.” (수 1:5)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그 곳에 거할 때 약하고
두려워하였으며 심히 떨었다고 말했다. (고전 2:3)
마치 지금의 여호수아의 심정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행 18:9-10)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보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굳세게 잡아 줄 수 있는 약속이 뭐가 있을까?
그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어떤 것보다 강하며 확실한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과 함께 하신다.
요셉이 종으로 팔려 갔을 때도
강간미수범으로 감옥속에 내쳐졌을 때도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광야에 내몰려 있을때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 놀라운 성취가 바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란 예언의 성취로 나타났다.(마 1:23)
그 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과연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몇 년 전, 예배를 드리던 중에 성령님이 주시는 깊은 감동이 나를 덮었다.
공기중의 밀도 보다 더 세밀하게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에 대해 묵상했고,
내 앞에 계신 주님을 뵙기를 꿈꾸며 찬양 드릴 때
내 눈에서는 뜨거운 감격의 눈물이 흘렀다.
‘주님, 이 시간이 오래 지속되면 좋겠네요.’
하지만 옆에서 예배드리던 친구가
내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던지 휴지뭉치를 얼굴에 가져다 대는 바람에
흐름을 놓쳐 버렸다.
얼마나 아쉽고 억울했던지 모른다.
그 사랑의 시간을 방해받은 아쉬움은 분명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그 일은 내 감정의 흐름에 대한 방해일 뿐이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중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혹, 하나님의 임재의 흐름까지도 내 감각을 중심으로 한
내 관점으로 해석하고 있지는 않은가?
때론 밀도감 있게 그 분의 만지심 가운데 있는 특별한 시간이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일상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렇다면 그 일상의 시간은 하나님의 임재가 미치지 않는 공간인가?
그 평범한 시간 속에 하나님을 초대할 때
그 시간과 그 하루는 거룩한 일상이 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끌려갔을 때
많은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바벨론의 신인 ‘마르둑’에게 패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할 때
눈에 보이는, 또는 우리의 오감을 통해
인지하는 것만이 실체의 다가 아님을 알게된다.
다니엘서는 1장에서 부터 그 사실을 말하고 있다.
바벨론에 의해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들이
바벨론에 넘기어 질 때(단1:2)
사람들은 바벨론과 느브갓네살왕을 칭송할 지 모르지만,
이 일은 분명 하나님께서 그리하셨으며 이미 백년전
히스기야에게 예언된 것에 대한 성취일 뿐이다. (사 39)
그 후, 다니엘서는 앞으로 있을 일들에 대해 명확히 기술한다.
너무나 정확한 나머지 많은 비평가들은
다니엘서가 이런 벌어질 모든 일 이후에 쓰여졌다고 이야기한다.
이들이 평가하는 전제는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미래의 일을 계시할 수 없다’ 라는 가정이 있기 때문이다.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존재인가?
하나님은 우리 머리속에 모든 것이 해석되어지고, 구성되어져야 하는 존재이신가?
조금 더 나아가
그 분은 사람을 만드시고, 만물을 만드신 후,
그저 구경만 하고 계시는 구경꾼이신가?
그렇지 않다면, 인생과 모든 만물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을
일상의 하루안에 초청하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이렇게 작고 여려보이는 여호수아를
성경은 ‘모세의 시종’으로 소개하고 있다. (수1:1)
하지만 여호와의 약속을 믿고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한 그의 마지막은
놀랍게도 ‘여호와의 종’으로 마치고 있다. (수24:29)
분명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처럼 여호수아와 함께 하셨다.
‘모세의 시종’으로 시작했던 그의 삶은 ‘여호와의 종’으로 끝을 맺은 것이다.
그는 분명 형통한 삶을 살았다.
성경은 그 비결에 대해 책의 처음을 못박고 있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형통하리라” (수 1:7-9)
하나님은 형통을 율법에 대한 순종과 연결지으셨다.
적에 대해 강하고 담대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에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가나안을 앞에 두고, 견고한 여리고성을 앞에 두고
하나님은 전쟁의 준비와 전술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백성으로서 취해야 할 모습들을 말씀하셨다.
창과 검이 아니라 그들을 인도하신 능력의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전쟁이 아니라 예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