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기까지 내 삶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처음 내 인생 계획이 어긋난 것은 고3 때였다.
친구들은 시험까지 시간이 조금이라도 길었으면 하고 바랐지만,
나는 빨리 수능시험을 치르고 결과를 손에 쥐길 바랐다.
눈앞에 목표가 있는데 막연하게 보내야 하는 시간이 지겹기만 했다.
하지만 막상 시험 당일에 마지막 시험 답안을 주르륵 밀려 쓰고 말았다.
‘꿈꾸었던 선생님은 못 되겠구나.’
원치 않은 대학을 다니던 어느 여름, 한 달간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긴 여행에서 돌아온 날 난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뜬 눈으로 밤을 꼬박 지새우고는, 다음 날 학교를 그만두었다.
수능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나는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두 번째 수능시험은 제법 잘 치렀다.
선생님이 되려고 학교 면접시험을 마치고 음감검사까지 마쳤는데,
신체검사에서 색약 판정을 받고 떨어졌다. 집에 돌아오니 엄마가 답답해하시며 말씀하셨다.
“넌 왜 보이는 그대로를 얘기하지 않니?”
난 보이는 그대로를 얘기했다. 그래서 떨어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또 다시 원하지 않았던 국제통상학과에 다니게 되었다.
군대에서 제대하고 복학한 뒤부터 남들처럼 나에게도 인생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나름대로 인턴십으로 회사에 나가 심부름도 다니고, 학교에서는 착하게 점수를 모아 가고,
이 모든 일들을 할 수는 있었지만 자꾸만 숨이 막혔다.
며칠 전, 아내와 함께 그 시절 성적표를 보다가 한참을 웃었다.
의미 있는 삶을 찾아 나서야겠다고 결심했던 4학년 두 학기 성적은 All ‘D’였다.
교수님들을 찾아가서 “날리지만(F) 말아 주세요.” 부탁하고는
고향을 떠나 서울의 골목을 쏘다닌 때문이었다.
학교 앞, 한 평 남짓한 고시원 방에서 3년이 넘는 시간을 보낸 경험이 있어서인지,
서울에서의 여섯 번의 이사가 전혀 힘들지 않았다.
발 디딜 틈 없던 작은 방, 햇살 한 줄기 들어오지 않던 지하 방, 반년이 넘게 물 새던 방..
어느 곳이든 나는 감사했고, 그곳이 내겐 천국이었다.
나의 대학생활은 온통 무료하기만 했지만,
그 시간들이 없었다면 과연 인생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고민했을까?
지겨운 시간을 지나며 느꼈던 공기의 소리와 먼지의 나부낌을 알 수 있었을까?
혹은 내 바람대로 선생님이 되었다면, 여전히 좋아하는 사진은 찍었겠지만
절대 지금 같은 사진은 찍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얼마의 색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선생님이 되지 못한 나는 사진을 찍는 사람이 되었다.
무책임한 얘기일 수 있지만, 내가 찍은 사진이 온통 새빨갛게 나왔다고 해도 난 할 말이 없다.
그래도 내가 찍은 사진으로 누군가를 웃게 하고, 행복하게 할 수도 있다.
사진 찍는 사람에게 색은 중요하지만, 전부는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