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브리서 기자는 안식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복음이라고 말하고 있다.(히4:2)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승리의 함성은 여호수아서와 사사기를 읽어보면
그리 오래가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약속의 땅이라지만 소돔과 고모라 같은 악한 땅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최악의 성폭행 사건을 비롯해서 같은 민족끼리의 전쟁으로
베냐민 지파는 멸망하다시피 하게 되었다. 인권유린과 납치..
여전한 한숨과 눈물, 아픔과 배신과 불신앙이 가득한 것을 보게 된다.
과연 그 복음이 가리키는 것이 어디인가?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히4:8)
성경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까지 인도해 냈지만
안식을 주지는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 그 자체는 안식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의 완전한 성취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완전한 성취, 궁극적인 안식은 예수님에로만 향해 있다.
죽음이 예수님을 지배하지는 못했지만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죽음의 고통과 경험으로부터 면제된 것은 아니었다.
(이 죽음을 단 한줄로 다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사망에게 사망을 고하고
부활하심으로 예수님은 그 분을 따르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구약과 그 이후 어떤 유대문헌에서도
대제사장이 무죄하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일 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백성들의 죄를
일시적으로 속죄하는 죄인 중 한 명이 아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무죄하신 분으로 우리를 위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신다.
하나님은 몇 년 간, 나의 죄된 본성을 보게 하셨다.
참 힘들고도 지루한 시간이었다.
수많은 기도모임과 넘치는 은혜를 맛보았고, 기름부음도 가득했지만
내안의 어쩔 수 없는 죄된 본성.
하나님은 그것들을 철저히 보게 하셨다.
죄의 실체를 절대로 부인하지 못하게 하셨다.
내가 사는 것은 오직 당신의 은혜임을 알게 하신 것이다.
나는 가끔 혼돈에 빠지기도 했다.
나의 죄된 본성과 불순종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신실하게 당신의 열매를 맺으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그러했다.
통로로 쓰임받는 것과 자신이 아무 문제 없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 의미를 혼돈할 때 안타깝지만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다.
하지만 믿음은 오직 하나님께만 향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가질 확신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향해야 하는 것이다.
그 분은 나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용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나는 그 은혜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함을 받는 것이 가능하지만
그래서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날마다 이루어지길 기도하고 소망하지만
그럼에도 온전하지 않은 세상이기에
사랑하는 그 분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그 본향을 그리워 하는 것이다.
그 영화로움을 그리는 것이다.
이제 곧 다시 오실 그 분을 기다리는 것이다.
두려움, 죽음과 저주를 예수님으로 상징되는 법궤로 인해 깨뜨리셨고
가나안 족속으로 대표되는 모든 악한 것들을 이 사건을 통해
반드시 쫓아내실 줄을 너희가 알것이라고 한다. (수3:10)
여전히 어둠이 가득해 보이는 이 땅이지만
빛은 이미 십자가가 세워진 날 침투해 들어왔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로 쉬게 하리라’ (마 11:28)라고
참된 안식을 말씀하셨던 바로 그 분에 의해서..
주님이 우리 안에 오시면,
빛이 임하시면,
두려움은 물러난다.
이 땅 모든 빈 자리 가운데 빛이 임하시면,
어두움은 물러난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고후 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