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누가 내게 물었다. 사진을 왜 찍냐고.
이 질문에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마냥 머뭇거렸다.
아마 그 사람과 헤어질 때까지도 답을 말하지 못했던 것 같다.
처음엔 그냥 취미로 시작한 사진이었다.
사진을 전문적으로 배운 적도 없고,
게다가 내 눈은 색약이다.
가고 싶던 대학의 신체검사에서 색약판정을 받고 탈락되어 집에 오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남들처럼 색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사람이 사진을 찍는다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그저 내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사진기로 그려낼 뿐이다.
사진은 나의 언어다.
유난히 말 주변이 없어서 한동안 ‘언어장애’라는 우스운 별명까지 가지고 있던 내게
어눌한 입술 대신에 사진이라는 언어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눌한 말, 색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 말고도 나는 약점이 너무나 많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 약점이 나는 감사하다.
약점은 나를 겸손하게 하고 그로 인해 좀 더 진실한 사진을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사는 불완전하지만 그 안에 진실과 사랑을 담아낼 수 있다면 그 뿐이다.
얼마 전 늦은 저녁 촬영을 마치고
돌덩이가 가득 들어 있는 듯 한 무거운 가방과 다리를 끌고 집에 오는 길에 너무나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
몇 년만에 보는 그 분과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서는 따뜻한 음료를 나눠 마시며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파지 줍는 할머니인데 그 분은 내 작업에 큰 전환점을 가져다 주신 분이다.
당시 나는 팔복의 저자인 우현 형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마리아’라는 말에 대해 묵상하고 있었다.
예루살렘과 유대 땅이 우리에게 익숙한 땅이라면 사마리아는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영역이었다.
‘나에게 사마리아는 어디일까’란 생각에 몰두하고 있는 내 곁으로 머리 하얀 할머니 한 분이 지나쳤다.
살을 에는 추위 속에 굽은 허리로 파지를 줍고 있던 그 할머니가 안 돼 보여
나는 몸을 녹이기에 턱 없이 부족했지만 따뜻한 음료와 인사를 건네주었다.
“할머니 이 차 드시고 몸 좀 녹이세요. 그런데 혼자 사세요?”
이런 추위에 따뜻한 방이 있어도 모자랄 판에 홀로 나와 파지를 줍는 모습이 측은해 보여 던진 질문이었다.
할머니는 아니라며 고개를 내저으셨다.
“그럼 아들네랑 사세요?”
할머니는 또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
“아뇨, 전 하나님이랑 살아요.”
아… 그 분의 대답에 나는 전율하고 말았다.
파지 줍는 가난한 할머니인 줄로만 알았던 그분은 누구보다 향기롭고 아름다운 세상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래… 저 할머니 같은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자.
어디서 피었다 지는지 모르는 들꽃과 같은 사람들,
이 세상에서는 무명하고 못난 자 같지만 천국에서는 유명한 자들……. ‘
그것을 깨달은 이후 나는 사진기를 들고
짙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자신을 태워 밝히는 촛불을 닮은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어느 날엔 세 딸과 노모, 삼촌네 아이들까지 데리고 사는 한 부부를 만났다.
남편은 택시로 아내는 눈 인형을 끼워 팔아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잠잘 곳 없는 이들에게 선뜻 방을 내어주는 삶의 웃음이 넉넉한 그들.
그런데 어느 날 아내는 남편에게 냉장고를 사 달라고 졸랐다.
그것으로 밥 못 먹는 노숙자들의 무료급식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삼촌네 자식들까지 키우느라 몸이 지쳤을 법도 하련만,
이제는 딸들도 장성했고 숨 좀 돌리고 자신을 위해 살 수도 있으련만
그녀는 아직도 사랑할 사람들이 많은 가보다.
제 삶 챙기기도 팍팍하련만 더 낮은 사람들을 향해 손을 내미는 부부의 모습은 내가 찍고 싶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또 언젠가는 한 여자아이를 사진에 담았다.
지영이라는 재미교포 아이인데 우연히 그 아이의 고민을 듣게 되었다.
“길영이는 노숙자예요. 아무도 돌봐줄 사람이 없는 아이인데
그 애를 알고 난 뒤부터 교회 갈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요.
마음으로부터 내가 그 아이를 도와주어야 한다고 들려요…….”
결국 지영이는 길영이를 찾아 나섰고 나는 카메라를 들고 함께 동행했다.
어둡고 후미진 지하도 어느 한 구석에서 잔뜩 웅크린 채 있는 길영이를 만났다.
녀석은 부끄러운지 우리를 보고는 점퍼를 뒤집어 쓴 채 나오질 않았다.
오랫동안 씻지 않은 탓에 역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영이는 “길영아, 누나 왔어”하더니
그 냄새나는 점퍼 속으로 들어가 함께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더니 웃음 가득한 얼굴을 때 묻은 길영이의 얼굴 가까이에 대며 하는 말.
“길영아, 예수..니임은 너를 사랑해..”
한국말을 완전히 익히지 못해 약간은 어색하게 말하는 지영이를 찍는
나의 렌즈가 자꾸만 뿌옇게 흐려진다.
사랑이란 꽃은 이처럼 드러나지 않은 곳에서 더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었다.
나는 안다.
파지 줍던 할머니, 가난한 부부의 넉넉한 마음, 지영이와 길영이의 아름다운 사랑…
이 세상에서는 모두 초라하고 묻혀 있는 이 사람들이 천국에서는 주인공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눈은 어쩌면 그렇게 세밀하고 정확하게 잘 찾아내시는지
그래서 나는 딱히 목적지나 대상을 정하지 않는다.
온종일 사진기만 들고 여기저기 거리를 지나면서 그 분의 눈이 찾아내는 그것을 찍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약점이 많고 허점이 많아도 내 사진기가 하나님의 시선과 함께 있다는 것이 마냥 감사해서.
내가 그 분의 사랑을 찍는 사진사라는 게 너무 행복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