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적으로 일하는것을 좋아한다.
일 자체를 좋아한다기 보다는 기다리는 시간을
경험하다보니,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알게 되었다.
기다리는 훈련을 지나, 내가 할 수 있는 한가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래서 한때 워커홀릭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만큼 중요한게
주님과 함께 쉼을 갖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나중에야 배우게 되었다.
쉼과 일, 현대 사회에서 적용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무한경쟁사회속에서 마치 쉼을 가지면
경쟁에서 뒤쳐지게 되는 위기와 두려움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묵상시간에
쉼을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는
너무 낭만적인 주제인 것처럼 느껴져서이다.
마치 많은 것을 가진 자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요소처럼 보여서다.
하지만 쉼을 갖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전제해야 하는데
하나는 대가지불에 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나를 소진시키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님의 나라를 꿈꾸지만, 동시에 나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이 있다.
나는 워커홀릭으로 시간을 보내는 중에
쉼을 말씀하시는 주님앞에서 적잖이 놀랐다.
그리고 쉼을 가질때 동반되는 두려움과 대가지불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참새를 돌보시는 주님을 묵상하며
내일의 두려움까지 오늘로 가지고 오는 현대사회의 아픔을 고민했다.
사람의 존재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너무 이상적인 말인가?
인권을 공부하게 된 것은 다행이고 감사하다.
하나님에 대한 전제를 공유하지 못하지만
세상에서도 사람의 존엄을 이야기한다.
내가 살기 위해 사람을 이용해서 끌어다 쓰는 병폐를
세상에서도 경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제가 다르기에 끝은 다른 싸움이 되고 만다.
내가 하는 일은 마침표가 없다.
그래서 스스로 멈추지 못하면
나는 균형을 잡지 못한다.
어쩌면 산다는 것 자체가 아름다운 일이 아닌가
때로는 상황에 버티어 내는 것,
그렇게 악다구니를 써가며 버티는 것을 통해
누군가는 웃게 되고, 누군가를 책임지고
그 시간이 주님과 관계 없는 시간이라 생각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성과 속을 나누는 것이다.
고흐의 시간을 들여다 보고 있다.
물론 부족하기 그지 없는 보통의 사람이지만
광산에서 복음을 외치다가 자신의 가진 것을
나누었다. 그로 인해 품위를 잃었다는 이유로
전도사의 자격을 박탈당했다.
고갱과의 갈등 직후, 자신의 귀를 잘랐다.
누군가에게 광기 어린 사람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초대 교부 오리겐도 마찬가지가 아니었는가?
주님의 시간안에서 나는, 우리는 어떤 모습인가?
세상의 표준 앞에서 믿음과 현실의 간극을 조율하지만
결국 수고했다. 잘 살았다의 평가는
우리에게 있지 않다. 오늘의 평범한 하루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