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는 무척 주의산만한
아이였던 것 같습니다.
주일학교 때 예배시간에는
주보에 침을 바른 후, 돌돌 말아서
뾰족한 칼을 만들거나
나무로 된 장의자 아래에 누워서
예배를 드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교회는 내게 놀이터였고
늘 환대 받는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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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은혜받기를 원하는 것은
부모도, 주일학교 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당장 아이들의 태도를 보면
한숨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
아이들을 꾸짖게 됩니다.
졸고 있는 아이의 옆구리를
꾹꾹 찌르기도 합니다.할말하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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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다 너를 위한 거야.”
라고 말하지만 과연 아이를
위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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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 때
소명이와 함께 예배드리다가
졸린 아이를 품에 안고
종종 재웠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곁에 있는 분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이가 교회에 이렇게
함께 있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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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아이들의 태도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꾸짖어서 아이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면
(이 문제는 충분할 만큼의
관계가 전제되어야 하겠지요)
백 번이라도 꾸짖겠지만
꾸짖으면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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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가 주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수용자 자녀들을 돌보는 세움과의
인터뷰에서,아이들을 만나는 장소가
따뜻한 느낌이기를 바란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어디를 가도 낯설거나 눈치를 봐야 하는
아이들이 ‘이곳은 나를 환대하는 곳이다’라는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곳.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좋아하지 않는 곳은 시간문제일 뿐, 결국
의무방어전을 위해 참석해 주는 곳이 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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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년 전, 중등부 아이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하다가
정말 식은땀이 줄줄 흐른 적이 있습니다.
앞자리에 앉아 있는 몇 명의 친구를
제외하고 내게 시선을 두는 아이가 거의 없었습니다.
겨우 강의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왔는데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아이들이 내 옆에 몰려 와서는
강의를 들으며 궁금했던 질문들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관심 없는 것처럼 보이던 아이들이 흥미 있게 강의를
듣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보이는 모습으로 아이들의 마음을
판단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던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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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다 너를 위한 것이다.”
라고 말하지만 아이들은
어른들의 마음과 언어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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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숨은 마음은 궁금해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태도와 목표만을 언급할 때,
아이들은 자신을 환대해 줄 만한 곳,
기댈 수 있을만한 곳을 찾게 됩니다.
예수님 외에 그런 곳이 있을까요?
파란 새를 찾아, 신기루를 찾아.
마음 둘 곳을 찾아 교회를 떠났다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속상했던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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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에 대한 설명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말입니다.
오래 참는 것이 사랑의 모습일 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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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산만했던 주일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아주 조금 진지해졌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예수님께 은혜를 구하거나
찬양 테이프를 사서 듣기 시작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면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뛰어놀았던 시간..
친구를 만나는 시간이었는지, 예수님을 알아가는 시간이었는지
모든 것이 모호했지만
지금 내게 너무 고마운 당시의 기억은
교회는 내게 머물만한 곳이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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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풍경 #14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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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만한곳 #환대받는곳 #고마운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