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 밀알이 되어 돌아가신 선교사님들의 묘가 있는 곳.
나는 양화진의 수많은 십자가 앞에 섰다
그리고 눈발이 날리는 풍경을 시작으로
이곳 양화진의 사계절을 찍고 싶었다.
미국, 볼티모어에서
나는 작고 초라한 묘 하나를 만났다.
박에스더의 남편 박유산의 무덤이다.
그 앞에서 떨리는 내 영혼을 어찌 할 수 없었다.
박에스더로 잘 알려진 김점동은 한국 최초의 여의사였다.
아펜젤러 선교사의 집안일을 돕던 광산 김 씨의 딸로 태어나
세례를 받은 후 에스더로 이름을 바꿨다.
볼티모어에서 양의학을 공부한 후
의사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여성들의 진맥조차 자유롭지 못하던 100여 년 전
조선의 여성과 수많은 환자들을 살리기 위해 충성하다가
결국 그녀 자신은 폐결핵으로 죽고 말았다.
남편 박유산은 당시 조선 사회의 신분의 차이를 넘어
박에스더와 결혼한 후 아내와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고 그는 밤낮으로 농장에서 일하며
아내를 뒷바라지하는데 자신의 삶을 헌신했다
그러나 아내가 의사가 되기 16일 전,
결국 박유산은 폐결핵으로 죽고 만다.
4년 간 이국땅에서 상투머리를 한 채,
고생하며 아내를 위해 흘려 온 그의 땀방울.
헛되고 미련해 보이는 이 작은 충성을 통해
하나님은 수없이 많은 영혼으로 열매 맺으셨다.
그리고 그 열매 가운데 내가 서 있는 것이다.
얼마뒤 나는 양화진에서 일본인 선교사 소다 가이찌의 묘를 만났다.
그는 일본인으로서 한국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살았던,
평생을 고아들을 품고 살아온 사람이다.
젊은 시절, 방랑생활을 하며 떠돌던 그는
31살 때 대만의 어느 길거리에서 술에 취해 의식을 잃은 채 죽어가고 있었다.
그 때 이름 모를 한 조선 청년이 그를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치료해 주고 회복될 때까지 밥값을 대주었다.
그로 인해 소다 가이찌는 조선에 헌신하게 되었고 결국 주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 또한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한 영혼의 섬김을 통해 시작되었다.
나는 박유산의 묘 앞에서
누렸던 그 감격과 감동을
소다 가이찌의 묘 앞에서 또 한 번 누리게 되었다.
주님은 천국이 작은 겨자씨 하나와 같다고 말씀하셨다.
이 작은 씨앗이 결국은 큰 나무 되어 온갖 새들이 깃들어 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당장은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지만
천국을 잉태한 작은 씨앗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
그런 믿음의 선진들의 수고와 헌신이 양화진 순교터에 구석구석 새겨져 있는 것이다.
백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이 작은 씨앗들이 누룩이 되어 먼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굳은 체질 또한 바꾸길 기도한다.
그렇게 변화된 각 개인의 부흥이 파도가 되어
한반도를 넘어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