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만 해도 임신한 아내는
심한 입덧과 피로 때문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아내와 함께 식탁에 앉아 예배드린 어느 날.
짧은 예배를 마치고 아내는 예배조차도 힘겹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 말이 고마웠다.
서로에 대한 섬김과 배려가 있어야 하겠지만
대화 가운데 솔직한 심정을 나누어야지만 가린 것을 걷어낼 수 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만일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이 세상의 신이 마음을 혼미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 고후 4:3-4
나는 비본질에 대한 부분은 그닥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본질에 대한 부분은 양보할 수 없는 것이다.
본질은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는 더더욱 그러하다.
하나님은 당신의 얼굴을 구하는 자에게 은혜 주신다.
겸손한 것은 무엇인가?
당신의 은혜를 구하는 자가 겸손한 자이다.
아내는 나와 결혼하고, 아는 이 한 명 없는 성남으로 이사 왔다.
그리고 처음 등록한 교회.(나 또한 그러했다.)
모든 환경의 낯섦.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우리가 구할 것은 감사다.
감사로 제사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아내와 다시 한 번 무릎 꿇고 기도했다.
그리고 함께 소리 내어 소원했다.
우리 입술에 하나님 주신 권세가 있다.
그 권세로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가 주님의 복된 자녀인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사실, 이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영역이다.
하지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아닌가.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 하셨다.
우리는 감정으로 기도하기를 즐긴다.
그 리듬을 따라 가는 것이 수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울음을 찾을 수 없어도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에 집중되지 않는 듯 보여도
믿음의 의지로 ,
하나님, 이 기도를 당신의 뜻대로 사용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밭가는 농부가 하루 종일 땀을 흘려도
지나간 자리는 그저 땅이 패였을 뿐 생명의 흔적은 하나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 땀 흘린 수고 아래,
보이지 않는 영역에 이미 생명의 태동이 준비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자주,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다 말한다.
하지만, 상황의 어떠함으로 기도를 멈추게 되면
영의 호흡이 멈추게 되는 것이다.
사단은 미혹한다.
자유하고 쉬라고..
그렇게 쉬다보면 편하다.
하지만 평강과 편함은 다른 것이다.
과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는가?
율법적으로 자신을 구속하란 말이 아니다.
하지만 가리어진 것을 깨닫는 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투명한 은혜 가운데 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본질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사는 삶이다.
그것을 위해 비본질은 조금 버려져도 되는 것이다.
사단은 그 역을 말한다.
비본질을 위해 본질을 내려놓으라고..
나는 아내를 사랑한다.
태어날 아이도 사랑한다.
우리 가정 가운데 소망이 있다.
세상에 유명하지 않아도
잘 살지 않아도,
여호수아처럼
나와 내 가정은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만 구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작은 순종을 드릴 것인데
그것은 본질을 향하는 내 사랑의 고백들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을 경작해 나가는 것이다.
하나님, 오직 당신의 은혜 아래 거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