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로 돌아온 후 한참이 지나도 복도가 조용하다.
모두가 피곤해서 지쳤나보다.
가방을 주섬주섬 챙겨서는 세준과 함께 올드시티로 향했다.
한국이라면 모를까 이 곳에서는 조금 더 몸을 혹사시킬 필요가 있다.
그 곳에는 골목이 있다. 아이들이 있다.
나는 골목을 좋아한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이곳 저곳에서 아이들이 웃고 떠든다.
그들의 몸짓과 존재만으로 나는 흥겹다.
속으로 웃으며 셔터를 누르지만 밤이라
도저히 카메라셔터가 날쌘 아이들을 따라잡질 못한다.
어느새 통곡의 벽까지 걸어왔다.
나는 3년 전에 처음 이스라엘 땅을 밟았다.
아침 일찍 예루살렘 구시가지를 구경하며 당시의 건축기술에 경탄을 표했다.
지금의 4차로는 될법한 고대 로마의 대로와
현대에 와서 보수한 성벽보다 더 견고하고 거대한 건축물들
성전돌 하나가 4톤이 되는 것도 있단다.
하지만 당시의 문화나 기술보다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유대인들의 종교적 열심이었다.
상인들이 철수한 아침까지도 그들의 기도는 멈출 줄 몰랐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아침 일찍 시작한 기도가 아니라,
밤이 새기까지 그치지 않은 기도였다.
그 곳에는 밤을 새워 기도하고 토라를 공부하는 유대인들로 가득했다.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부인들이 가발을 쓰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자신들로 여성의 매력을 떨어뜨려
남편들이 더욱 말씀에 매진하도록 하기 위해 삭발을 했기 때문이란다.
이들의 열심을 누가 따라잡을 수 있을까?
밤이 새도록 기도한 그들을 그저 율법적이라고 손가락질 할 수 없는 것은
메시야를 애타게 기다리는 그들의 진정성 때문이다.
나는 도저히 율법의 의로 이들과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유대인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면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처음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삼은 것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다윗 왕에게 말씀하신 약속과
약속의 땅,
그리고 성전이었다.
그런데, 주전 586년에 이 3가지를 다 잃게 되었다.
바벨론에 의해 유대가 멸망하며 정체성은 혼란에 빠지게 된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를 있게 한 것인가?
내가 누구인가? 과연 하나님의 백성이 무엇인가?
그 참혹과 혼란 속에서 그들은 말씀을 붙들게 되었다.
바벨론에서 돌아와 에스라를 중심으로
다시 말씀을 낭독하며 그것을 지키기를 힘쓴 것이다.
하지만 이후 종교적 열심이 뛰어난 하시딤들이 말씀을 더 잘 지키기 위해
본디의 성문율법에서 울타리를 치기 위해 장로들의 유전을 구전율법화 시켰다.
그렇게 만든 구전율법(oral law)은 종교적 엘리트들에 의해 전수되었고
하나님의 본 뜻과 상관없이 외식하기에 이르렀다.
종교인들은 종교생활만 하면 되기에 이런 구전율법을 지킬 수 있었지만
보통 사람에게는 죄를 지적만 할 뿐 그들이 지킬 도리는 없었다.
“그 날들이 너에게 닥칠 것이니,
너의 원수들이 흙언덕을 쌓고 너를 에워싸고,
사면으로부터 너를 공격하여서,
너와 네 안에 있는 네 자녀들을 짓밟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얹혀 있지 못하게 될 것이다.”(눅 19:43-44)
주후 70년 경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과 함께 성전은 무너져 내렸고
그들은 자신들의 구원의 근간이 다시 한 번 허물어 지는 것을 겪어야만 했다.
구전율법은 예루살렘 멸망으로 위기를 겪었고 결국 주후 200년에 책으로 기록되었다.
이것이 ‘미쉬나’이며 그에 대한 주석이 ‘게마라’이고 이 둘의 합본이 ‘탈무드’다.
당시 디도 장군은 자신들이 얼마나 화려하고 커다란 성전을 부수었는지를
과시하기 위해 서쪽 벽을 조금 남겨 두었는데
그것이 지금의 통곡의 벽이다.
그 후 유대인들은 이 곳으로 출입할 수 없게 되었으나
7세기에 오마르 왕이 일 년에 단 하루, 성전이 파괴된 날 유대인들의 출입을 허용해 주었다.
그 날 흩어진 모든 유대인들이 이 곳에 모여 허물어진 벽을 부여잡고 통곡했다고 해서
이 곳 이름이 ‘통곡의 벽’이 된 것이다.
그 후 1967년 6일 전쟁으로 이 천년만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성지를 되찾게 되었다.
그들의 굴곡진 시간들을 이렇게 눈물흘리며 기도하는 것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인자, 곧 약속하신 메시야가 와서
다시 이스라엘에 다윗의 시절이 도래하기를 소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그들의 눈을 가리고 있는 수건이 벗겨져서
그렇게 탄식하며 기도하는 그네들의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인것을 알게 해달라고.
“의를 추구하지 않은 이방 사람들이 의를 얻었습니다.
그것은 믿음에서 난 의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의의 율법을 추구하였지만,
그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롬9:30-31)
당시 하나님을 알지도 못했던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의를 획득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그들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 의와 율법을 추구했지만
그 율법,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향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 분은 모든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하게 하러 온 분이신데 말이다. (마5:17)
결국 그들이 추구했던 의와 율법은,
정죄만 할 뿐, 지키지 못하는 구전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으로 대표되는 것들이 아닐까?
(실제로 몇 가지 책들은 본문의 법(nomos,law)이란 단어 앞에 정관사가 없으므로
바울은 역사적 사실로써의 모세의 율법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을 이해하고 지키는 방법에 대한 말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부끄러웠다.
그들이 놓친 무언가를 더 얻은 것 같아 목이 뻗뻗해진 우리는
과연 다시 오실 우리의 메시아를 위해 얼마나 기도하고 있는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으로 부르신 은혜.. (호2:23)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신 그 주님의 은혜.. (롬9:22)로 말미암아
백성된 나는 마치 취하는 술에 잠겨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하나님은 자기의 (원래) 백성을 버리셨는가?” (롬 11:1)
바울이 로마서에서 던진 이 질문은 바로
전날 밤부터 종일을 기도하는 유대인들의 기도 제목이었다.
바울은,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서 나는 이들의 질문에 숨가쁜 기도로 답해야만 했다..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예루살렘 구시가지의 미로 같은 길이 익숙치 못해서
한참을 헤매서야 겨우 숙소로 돌아왔다.
마치 예수님이 거니셨던 모든 길을 나도 함께 걷는 기분이었다.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