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엘(Bethel)로 향했다.
찬 바람과 수직으로 내리쬐는 햇볕이 묘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벧엘로 가는 길 양 옆으로 갑자기 광야가 등장했다.
이스라엘의 크기가 우리 나라의 경상 남,북도 정도인데도 불구하고
고작 몇 분을 차를 타고 달려도 만나는 풍경과 기후는 변화무쌍하다.
시내에서 광야로, 다시 골짜기가 가득하다가 평지가 나오고,
해발 800m 의 고지대에서 잠시후면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곳을 달리게 되고
울창하다가 평원이 나오더니 어느샌가 이렇게 광야를 달리게 된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2월부터 낙원으로 바뀐다고 한다.
메마른 먼지로 가득해 보이는 이 땅에 우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런 여러 요소들이 복합되어 이 작은 땅에
시베리아, 지중해성, 우랄알타이 초원, 아라비아 사막, 열대성 지대 등
놀랄만한 동식물의 영역들이 펼쳐진다고 한다.
벧엘이라는 표지를 따라 들어가는 길 입구를 커다란 바위가 막고 서있었다.
어디로 갈지 몰라서 지나는 분에게 길을 물었는데
그 분이 바로 벧엘시장이시다.
촬영을 하다 보면 이런 놀라운 만남과 풍경을 자주 겪게 된다.
언젠가 우현 형과 함께 몽골에 갔을 때의 일이다.
몽골에서 부흥의 바람이 일어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흔적들을 촬영하러 우리가 몽골에 도착한 다음 날, 갑자기 눈보라가 몰아닥쳤다.
예상치 못한 눈보라에 우리는 행선지들을 모두 수정해야만 했다.
그런데 우리 차를 운전해 주시던 장로님이
갑자기 가져올 물건이 있다며 우릴 전승기념관에 내려놓고 떠나셨다.
우린 눈보라가 몰아치는 산 위에 어안이 벙벙한채 서있어야만 했다.
그렇게 추위속에 떨고 있는 우리를 몽골인들이 불쌍하게 봤던 모양이다.
자신들이 타고 있던 차 안에 우현형과 여진구대표님, 이용규선교사님등을 태워주셨다.
교대로 몸을 녹이기로 하고 우린 눈보라 속에서 몸을 비비며 차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 사이 놀랍게도 차 안에서는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다.
우리가 몽골에 머물기로 한 며칠사이에
몽골인들이 주님을 영접하는 장면들을 촬영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해하지 못할 그 상황속에서 복음이 제시되고
영접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담을 수 있게 되었다.
몽골인들이 손을 모아 영접기도를 마치고 “아멘” 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밖에서는 우리가 “차 왔다!” 며 환호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이번 여정에도 측량못할 하나님의 연출방식을 소원하게 된다.
시장은 벧엘에 대해 설명하며 야트마한 전망대로 우릴 인도하셨다.
이 곳에서 주위를 살피면 날씨가 좋은 날에는 헬몬산부터
지중해, 사해까지도 다 보인다고 한다.
시장이 유적지라며 가리키는 곳으로 걸어 갔다.
이 곳은 야곱의 유모 드보라가 묻혔던 유적이다.
이런 놀라운 유적들을 발굴만 할 뿐
보존을 위한 기념터 조차 제대로 만들어 놓지 않는 것에 놀랐다.
아브라함 헤셀의 말처럼 ‘아무리 더럽혀질 수 없을 만큼
신성하다고 해도, 공간의 사물은 훼손되지 않을 만큼
신성한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때문인 것 같다.
어쩌면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땅을 파보면
고대 유적지이기에 일일이 손 대기도 겁나겠다는 생각도 든다.
야곱은 유모를 잃은 슬픔을 기리며 이 곳을 알론바굿이라 이름했는데
이는 ‘통곡의 상수리나무’라는 뜻이다.(창35:8)
세겜에서 야곱의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고
시므온과 레위가 하몰과 세겜의 모든 남자를 죽이고 노략했다.
야곱은 가나안인들이 자신에게 복수할 것을 두려워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떨고 있는 그를 만나 이르셨다.
“벧엘에서 단을 쌓으라.” (창 35:1)
벧엘은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집을 떠나서 도망할 때
하나님을 만나 서원했던 장소다.
도망하다가 그는 밤을 맞았고 돌 하나를 주워 베게를 삼았다.
차갑고 외로운 밤바람을 이불 삼은 그 곳에서
하나님은 그를 만나주셨다.
사실 벧엘의 원래 이름은 ‘루스’였지만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면서 이 곳 이름을 ‘벧엘’ 곧 ‘하나님의 집’이라 명했다.
우리는 이 곳 상수리나무 아래 돌무더기 위에서 예배 드렸다.
야곱이 눈물 흘렸던 곳이 바로 하나님의 집이 된 것처럼
우리가 예배 드리는 이 곳에 벧엘의 은혜가 있기를 찬양했다.
하나님이 야곱을 처음 만나주셨던 그 곳- 벧엘로 갈 때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곳에서 내 환난의 날에 내게 응답하시고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 제단을 쌓을 것이다.”
가족을 떠나, 형의 살기를 피해 떠날 때
그 차가운 돌베게에 누워 그가 흘렸을 눈물을 생각해 본다.
도현형의 노래 가사처럼 이젠 돌아갈 길이 없어 지난 이야기들은 눈물로만 흘렀을 것이다.
사람에게 길이 없다는 것만큼 막막한 게 어디 있을까?
길이 안 보인다는 것만큼 절망스러운 게 어디 있을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고 광야 생활을 시작할 때
왜 광야 ‘초기’에 시내산의 말씀을 받았을까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광야에는 길이 없다.
그런데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길이 되어 준 것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나라.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신8:2-4)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이
그들에게 길이 되어 주었고, 그들을 살게 한 것이다.
야곱에게도 아무 길이 보이지 않았던 밤,
하나님은 그를 만나 주셨고 길이 되어주셨다.
그래서 야곱은 ‘환난의 날에 자신을 만나주셨고,
가는 길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라 고백하는 것이다.
히브리어에 익숙한 진상 형이 나중에 자신이 연구한 말씀을 나누어 주었다.
성경은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은 사건을 왜 이곳에 위치했을까? 하는 것이다.
유모가 죽고 하나님은 야곱을 찾아 여러 가지를 약속하셨다.
야곱에게 복을 주어 자손에 대한, 땅과 함께
야곱의 이름을 다시 이스라엘로 고쳐 부르셨다. (창 35:1-15)
야곱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다시 벧엘로 올라갈 때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자에게서
이방 신상과 귀에 있는 고리를 세겜 근처 상수리 나무 아래에 묻었다.
그가 아직까지 가지고 있었던 우상이었다.
공교롭게도 유모 드로라가 죽었을 때도 그는 벧엘의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했다.
유모 드보라는 야곱에게 있어서 마지막 의지할 곳이었는지 모른다.
마지막 의지했던 유모를 우상을 묻었던 것과 같이 상수리 나무 밑에 묻고서야
하나님은 그를 만나신 것이다.
하나님이 야곱을 만나주실 때
자신을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원어는 ‘엘샤다이’다.
엘샤다이 라고 하면 능력자라는 생각이 가득한데 원어의 뜻은 ‘젖먹이’라고 한다.
그저 힘이 센 하나님이 아니라
그 분은 모든 원천이라는 의미에 도달한다.
성경의 앞과 뒤를 살피면 그는 이제껏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가지고 있으면서 신뢰했던 모든 우상을 상수리나무 아래 버리고
이제는 의지하던 유모 마저도 죽은 것이다.
상수리 아래 우상을 묻었던것처럼 믿었던 유모를 상수리나무 아래 묻었다.
하나님 외에 모든 신뢰하던 것들이 어떤 의미에서 우상인 것이다.
믿었던 모든 것을 묻어 버렸을 때
하나님은 그 때 야곱을 찾아와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너의 유모가 될것이다.”
“내가 너의 원천 될것이다. ”
젖먹이에게 엄마만 있으면 충분하듯
모든 것을 버린 이에게 하나님만 있으면
‘그 분으로 충분합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또 그 고백을 할 때까지 주님은 오랫동안 기다리신다.
하나님외의 모든 의지 할 것들을 상수리나무 아래 묻으면
그 때서야 하나님이 그에게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 되신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하신 약속들 중에 내 마음을 두근거리게 한 것이 있다.
이미 네 아내와 열 명이 넘는 자녀를 가진 야곱에게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하신다.
마치 하나님이 처음 인간을 축복하셨을 때 하셨던 말씀처럼 ..
그리고는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올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창34:11)
뱀의 머리를 짓밟을 여자의 후손에서 시작된 이 이야기는
아직도 까마득히 먼 이야기지만, 초점은 보다 분명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야곱에 와서 왕에 대해 약속한 것이다.
그 보이지 않는 역사의 물결은 라합에게로 다시 룻에게로
그의 증손자인 이새의 막내 아들에게로 흘러갈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역사의 흐름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 아기를 주실 것인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실 것이다! (사9:6-7)
이 얼마나 신실하신 약속의 성취인가!
스프링 플라워 (Spring Flower)
이름이 곱다.
이 작디 작은 꽃이 피면 사람들은 “이제 봄이 오는구나.” 라고 말한단다.
여전히 날씨는 차지만 이렇게 겨울을 깨고 봄은 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종국에 어둠을 깨뜨리고 빛만이 가득하게 될 것이다.
besides..
※ 참고)
학자들 사이에 샤다이에 대한 논란이 있다고 합니다.
보통 샤다이를 원어로 검색해 보면
사람이나 동물의 가슴으로 나옵니다.
시편 22:9 등에 샤다이가 ‘어미의 젖’으로 쓰입니다.
하지만 엘샤다이 할 때 샤다이의 뿌리는 샤다드라고 보고 있고
다른 곳의 샤다이는 슈드라고 보는 게 전통적인 견해입니다.
샤다드는 almighty 라고 보고, 슈드는 breast라고 스트롱에서는
보든데 반드시 그렇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엘샤다이를 그냥 고유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보고
샤다이를 젖먹이는 것으로 보지만
창세기 49:25에 전능과 젖먹이는 표현이 동시에 나오는데
이는 동일한 단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