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원의 샘’이란 뜻을 가진 ‘엔케렘'(Ein Kerem)
예루살렘의 서쪽에 자리잡은 세레요한의 고향이다.
이 곳에는 세례요한교회, 마리아의 샘, 마리아 방문교회 등이 있다.

-마리아 방문교회
세례요한.
아침에 말씀을 읽으며 그에 대해 묵상했다.
누가복음 3장의 시작은 세상의 통치자들에 대해 열거하고 있다.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 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는 유대의 총독으로 있었고 헤롯은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은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그리고 종교 지도자인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었다.
그들이 화려한 궁전과 성전에서 통치하고 있었다.
그 때에!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임한 것이 아니라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 것이다.
이 얼마나 통쾌한 역전인가.
그렇게 세례요한의 공생애가 시작된다.
이 빠르디 빠른 세상을 살다 보면
서둘러 앞서 가는 이들과 합류해야 할 유혹이 생긴다.
그들과 함께 서 있다면 자부심을 느끼고
그들과 멀어져 있는 자신을 비교한다면 사람들은 부끄러워한다.
그것은 유행으로 시작해서 권세와 학벌, 지위, 좋은 집, 좋은 옷..
비교하기 좋은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자리매김하곤 한다.
하지만 혼자 있을 때 사람은 누구와도 자신을 비교하지 않는다.
다만 그 때는 오직 하나님과 자신만의 시간이다.
세례요한은 빈 들에서 부는 바람속에
– 하나님의 동풍 가운데 서서 자신의 공생애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 것이다. -눅3:2
세례요한은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로 권하며
하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지만 그를 따르던 무리는
예수님이 오시자 그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와 제자들은 금식하고 절제하며
떡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며 힘써 경건하기를 힘썼는데
오신 메시야라고 하던 자는 잔치에 몰두하여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와 죄인들과 친구맺기를 일삼고 있는 것이다. – 눅 7:33-34
이런 저런 소문을 듣고는 불평하던 자신의 제자들에게 세례요한은 말했다.
“그가 신랑이시다.
나는 그의 친구로써 신부를 취하는 그의 음성을 듣고 기뻐하고
그 기쁨으로 충만하단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 요3:25-30
세례요한의 이런 고백은 내 가슴을 뜨겁게 고동치게 만들었다.
도대체 이는 어떤 사람인가?
제자들은 자신들을 따르던 모든 사람이 예수께로 떠나가는 것을 보며
자신들의 사역은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떤 조치를 취해 떠나간 사람들을 다시 자신들에게로 돌이켜야 겠다고 생각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주인공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을 인생의 주인공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세례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았다.
그는 자신이 신랑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그는 신랑의 친구로써 그 기쁨에 동참했으며 충만했다.
헤롯은 결국 요한을 옥에 가두었다.
그가 옥에 갇혔을 때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지만
그리고 마지막까지 순종하였지만 그 또한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을
하나님께 묻고 또 물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명확한 답을 주신 것 같아 보이진 않는다.
예수님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선지자중에 가장 큰 이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당신이 오실 그 이 입니까?”
옥중에 갇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세례요한의 이 질문에
예수님은 “나로 인하여 실족치 않는 이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눅 7:18-23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서있는 길 위에서조차
우리는 똑같은 질문을 하나님께 묻는다.
“당신의 뜻이 과연 이것입니까?”
그 질문은 얼마나 절박한가?
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 가운데 서 있고 싶은데
전혀 실용적이지도 않는 이런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것이 합당합니까?
하지만 성경속에 나타난 누구에게도 이 질문에 명확한 답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명확한 미래를 안고 살았던 사람 또한 없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야곱과 요셉이, 모세가 그랬으며 다윗이 그러했다.
짧은 시간동안 가장 극심한 환란에 처했던 욥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자신을 둘러싼 친구들과 벌인 논쟁의 대부분은
이 환란이 어디서 비롯되었나 하는 것이다.
하지만 후에 욥은 이렇게 고백한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 욥23:10
우리가 가는 길은 우리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날마다 옳으신, 선하신, 목자되신 우리 주님이
나의 가는 길을 아신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말인가?
나는 나의 가는 길을 알지 못하지만 주님이 내가 가는 길을 알고 있기에
내가 이해하지 못할 이 시간에
주님으로 말미암아 실족치 않는 이는 복이 있다는 것이다.

– 세례요한교회 안의 그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