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뽕나무로 번역된 이 나무는 돌무화과나무다.)
키가 작았던 삭개오는 사람들에 가려 보이지 않은 예수님을 보기 위해 이 나무에 올랐다.
삭개오는 여리고에 살고 있던 세리장이었으며 부자였다.
세리들은 세금을 로마에 바치는 과정에서 불법으로 세금을 징수해서
‘면허증을 가진 강도’라 불리며 사람들에게 매국노와 죄인 취급을 당했다.
그런 세리들의 우두머리가 바로 삭개오였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가이사랴와 가버나움, 이 곳 여리고 세 곳에서 세금을 거두었는데
특히, 여리고는 국경도시이자, 향료의 생산지로써 유명했으며 예루살렘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그 시대의 가난하고 누추한 풍경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세리장의 생활은 윤택했겠지만 그의 마음은 곤고했다.
어쩌면 내가 수없이 던진 질문을 동일하게 중얼거렸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시간이 빨리 흘러가 버렸으면.. ‘
등뒤에서 수군거리는 비난과 손가락질을
보지 않았지만 볼 수 있었고, 듣지 않았지만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을 구원해 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자신의 부끄러운 인생을 다시 시작하고 싶은 생각을 수백번도 넘게 해보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인생을 믿고 맡길만한 누군가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런 용기조차 나지 않을 것이다.
수치심 보다 부유함을 놓기는 싫었다.
이만큼 누리고 살아온 인생길도 쉽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기름진 삶은 부끄럽고 누추한 시간의 보상이리라.
이제 그는 사람들의 비난에 무감각해졌을 지 모른다.
세리장이 되기까지 그는 열심히 세리의 일을 했을 것이고
그는 주위 반응에 더욱 무감각해지려 애썼을지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 삭개오는 한 사람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으며 (마9:11)
같은 직업을 가진 마태라는 사람을 자신의 제자로 부르신 분이시다. (마9:9)
스스로도 죄인이라 여겨 포기해버린 삭개오의 빈 마음 가운데
한 사람이 문을 두드리며 찾아오신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죄인들의 친구라고 불렀다. (마11:19)
삭개오가 과연 누구를 만나고 싶기나 할까?
여리고에서 소문나 있는 부자가 더이상 누구를 궁금해 하기나 할까?
권세 있는 사람과의 만남은 그저 더 높은 권력을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짐작컨데 그는 더이상 사람을 상대하는데 진력이 났을것이다.
모든 것을 가졌지만 그는 외로웠다.
그런 그에게 죄인의 친구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 찾아오셨다.
외로움과 호기심과 그리움은 그가 가진 사회적 체면도 열등감도
버려둔채 그를 나무에 오르게 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찾아오셨다.
먼발치서 보기만 해도 좋을 만남이라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그의 이름을 부르셨다.
그의 이름이 이렇게 다정하게 불려진 때가 언제였을까.
어쩌면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 보다
예수님의 마음이 더 간절했는지 모르겠다.
예수님은 마치 사마리아 여자 한 명을 만나기 위해
타는 목마름을 안고 가야만 했던 것처럼, (요4)
거라사 광인 한 명을 만나기 위해 그러하셨던 것처럼 (눅8)
이 곳 여리고에서도 가난한 부자 한 명을 만나러 오셨는지 모르겠다.
하나님의 일은 지극히 작은 자 한 명을 돌보고 섬기고 세움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얼마전, 중고등부 수련회를 인도했다.
원래는 마지막 오후 강의를 마치고 짐을 싸 서울로 돌아갈 예정이었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특별한 계획이 있었다.
마치 여리고의 삭개오를, 거라사의 광인을 만나게 하시려는 것처럼..
그래서 감사했고, 또 감사했다.
예정했던 강의를 마치고 짐을 싸고 있는데
갑자기 장로님들과의 저녁 약속을 잡게 되었다.
그로 인해 서울로의 출발을 2시간 정도 늦추게 되었다.
갑자기 시간이 조금 남게 되었다.
계속 맡아 왔던 상담을 한 두명 더 맡으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마지막 상담을 담당 전도사님과 함께 하게 되었다.
사실, 상담에서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상담의 전부이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는 것은 어떤 면에서
가장 실질적인 도움이 될것이다. 영적세계의 진동이 있을테니까..
전도사님과의 나눔, 그리고 그 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 질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로 도왔다.
기도를 마치고 떠날 준비를 하기 위해 짐을 꾸려 차에 싣고 있는데
전도사님이 운동장에서 뛰노는 몇 명의 학생들을 내게로 불러 모았다.
“이 아이들을 위해서도 기도를 부탁드려요.”
“이 아이들은 누군가요?”
“우리 고등부의 리더들인데
날마다 학교에서 전도해서 거의 60명 되는
새신자들 앞에서 매 주 설교도 하는 대단한 친구들입니다.”
아. 어리다고만 생각한 고등학생들이었는데
전도사님의 설명에 내 가슴이 쩌릿쩌릿 해왔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주 작은 수, 하지만 깨어있는 소수에 의해 세워진다.
수많은 촬영과 기도를 통해 이미 보아왔다.
내가 며칠간의 수련회 동안 수고한 것도, 그 이유였다.
그들에게 방언으로 기도하는지를 물었을 때 모두들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이 시간들은
어쩌면 이들을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머물던 방에서 작은 기도모임을 가지게 되었다.
전도사님은 서둘러 눈에 띄는 리더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그래서 10명 정도 되는 아이들과 더불어 방언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게 되었다.
너무나 헌신된 아이들이었지만 그들중에 방언으로 기도하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헌신되어 있기에, 그리고 어느 정도의 결실도 볼 수 있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에 대한 간절함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그 한계와 차이를 말해줄 수 있을까?
내가 강아지를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과
내가 우리 딸 온유를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
똑같은 단어를 사용하지만,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는 비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께는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그 차이를 메울 수 있는 것이 바로 영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필요없다고 여겼던 방언을 내가 처음 구한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작은 기도가 내 삶을 얼마나 역동적으로 바꾸어 놓았는지 모른다.
나보다 더 이른 나이에 헌신한 이들에게 하나님의 역사를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깊고 뜨거운 기도를 마치고, 방에 모인 모두가 영으로 기도하게 되었고
나는 장로님과의 식사후 기분좋게 서울로 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전도사님께 전화가 왔다.
“아까, 방에서 함께 기도한 자매가
너무 기뻤던 나머지 친구들에게 자신이 방언으로 기도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친구들이 지금 안타까워서 울고 있습니다.”
서울로 올라가다 말고 차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아내에게 전도사님과의 대화를 말해 주었다.
“아까 기도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고등학생들이
그동안 방언으로 기도하길 소원했는데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해서
많이 속상해 하고 있나봐. 그래서 울고 있대.”
“그러면 다시 돌아가야 하는것 아냐?
그 아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지.”
그래서, 다시 전도사님께 전화해서 기도할 시간에 대해 여쭈었더니
다음 스케줄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라
밤 12시는 넘어야 기도모임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은 우리 가족에게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지금 기도하는 것은, 몇 시간을 내면 되는 문제이지만
밤 12시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남았고, 기도모임을 끝내고
서울로 출발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 될터였다.
우린 집을 떠나온 지 이미 열흘이나 지난터라 많이 피곤한 상태였다.
그리고 며칠뒤면 다시 인도로 촬영을 떠날 계획이라
그나마도 집에는 이틀정도밖에 머무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내와 나는, 암묵적인 동의를 가지고 차를 돌려 수련회장소로 돌아왔다.
하지만 마음이 그리 편치는 않았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서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다 잠들었다.
알람소리에 일어나 강당의 구석진 곳에 기도했다.
그 사이 밤 12시부터 기도모임이 있다는 광고.
하지만 내가 수련회 장소로 다시 돌아왔다는 광고는 하지 않기로 했다.
정말로 기도하고 싶은 사람들만 모으려는 계획이었다.
담당 전도사님은 리더들 15명 정도가 모일거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한 명, 두 명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더니 6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
기도 인도는 생각보다 많이 힘들었다.
평소에 기도하지 않은 사람을 안고 기도하는 만큼 힘든 일이 있을까?
방언은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자신이 기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리를 내서 기도해야 하는데,
태어나서 처음 소리내서 기도하는 사람이 있을정도였다.
나는 이미 목이 다 쉰 상태였는데
목이 쉰 내 목소리보다 더 작은 소리도 내기 힘든 아이들..
기도가 필요한 사람은 손을 들어 표시해 달라고 하면
손을 든 친구가 얼핏 보아도 반이상은 되는 것 같아 보였다.
그렇게 한 명 한 명, 쉼 없이 쫓아다니며 기도했다.
기도회는 늦은 새벽에야 끝이 났다.
어떻게 잠들었는지 모를 정도로 눈을 감았다가
알람소리에 깨어 식당으로 내려갔다.
온유가 먹을 수 있는 메뉴가 아니라면 조금이라도 일찍 서울로 출발하려는 계획이었다.
식당으로 걸어가는데 남학생 한 명이 수줍게 내 곁에 와서는 허리 굽혀 인사했다.
“전도사님, 어제는 감사했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기도해야 할 지 몰랐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믿음이 무엇인지, 구원에 대한 확신조차도 희미했지만
어제 기도하는 사이,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방언으로 기도하게 되었고.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 이런 한 명의 변화만으로도 내가 남은 의미가 되겠구나.
하나님의 나라는 크고 놀라운 데서가 아니라
지극히 작은 한 영혼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고 늘 생각해왔는데..
그러면서 내 안에 회개가 가득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내 발걸음을 하나님이 이끄시는데로 옮기겠습니다.
라고 자주 고백했지만,
내가 걸어갈 방향이 일단 정해지면
그것을 바꾸는 건 불편한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당신의 기쁘신 뜻을 내 삶에 간섭해 주신다는 것은
사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내 삶에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는 것만큼 고통스런 일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내가 이미 결정해 놓은 발걸음이지만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그것을 옮기겠습니다.
그것이 회개라고 본다. 사랑이 동사라고 했던가? 회개도 동사다.
집으로 돌아왔더니
수련회 때 은혜 받은 친구들의 많은 메일이 와있었다.
그런데 하나같이 구원에 확신조차 없었던 친구들이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소망이 전혀 없던 친구들이
이번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부어주신 은혜가
너무 벅차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나님은 은혜에 대해 감격하는 사람들에게 더 큰 은혜를 부어주신다.
나는 마치 삭개오의 노래를 듣는 것 같았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의 반응은 너무나 순수하고 신속했지만
회개의 내용은 구체적이고 뜨거웠다.
그는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다고 말하며
누군가를 속여서 취한 것은 그것의 4배로 갚겠다고 말한다. (눅19:8)
누구보다 돈의 권세를 잘 알고 있던 세리장 삭개오였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 돈의 권세가 아니라 예수님의 권세에 굴복하게 된 것이다.
함께 기도했던 한 고등학생은 새벽마다 한 시간씩 기도하기로 했다.
그의 아버지이신 목사님이 아침에 말을 거셨는데,
기도가 다 끝난 뒤에 모든 일과를 시작하겠다고 말했단다.
작고 사소한 사건과 만남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이루신다.
분발하지 않으면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될 것이다.
일의 시작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과 작은 순종이다.
“내 집에 유하겠다.”
삭개오는 이 날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이 죄인인 자신의 집에 찾아와 주신 것.
예수님은 방금 전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말씀하셨다. (눅18:25)
부자는 그것을 고민했다.
모든 계명을 지켜오던 그는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깨닫지 못했을지 모른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눅18:22)
제자들 또한 부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 놀랐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눅18:26)
하지만 삭개오는 그것을 알았다.
자신은 스스로도, 다른 사람에게도 철저히 죄인이었다.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아는 자에게 예수님의 손내미심은 놀라운 은혜이며 긍휼이었다.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눅 18:27)
삭개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이다.
선택받았다고 자부하는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다고 수군거렸다.
그들 또한 부자청년처럼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한다.
나는 누구보다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철저한 죄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시몬에게 질문하셨다.
오백 데나리온 빚 진자가 있고, 오십 데나리온 빚 진 자가 있는데
갚을 것이 없어서 둘 다 탕감했다면 주인은 둘 중에 누굴 더 사랑했겠느냐?
시몬이 대답했다.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예수님은 옳다. 말씀하셨다. (눅 7:36-50)
이 얼마나 복된 소식인가?
내가 죄인임을 깨닫는 만큼
아버지의 사랑은 폭포수 같이 나를 덮는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9: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마21:3)
주님은 이 큰 성 여리고에서
자신의 힘으로 아무것도 볼 수 없었으며
사람들이 그를 잠잠케 하려 함에도
끈질기게 예수님께 매달리며 도와달라고 외친 소경 바디매오와(막10:46, 눅 18:35-43)
자신이 어떠한 죄인인지 잘 알고 있었던 삭개오의 영혼을 얻으셨다.
목자되신 그 분은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 오셨다.
그리고 그 분은 예루살렘으로 향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이유를 거듭 말씀하셨다.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눅18:31)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깨닫지 못했고 오해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왕으로 등극하여 통치하실 것을 기대했다.
제자들 뿐 아니라 군중들도 마치 마카비우스가 시리아를 물리치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처럼 로마의 통치로부터 해방시켜줄 구원자로 예수님을 환영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향하는 길목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묵묵히 순종하셨고 귀 기울이셨다.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당신은 예루살렘을 향해
누구보다 앞장서서 걸어가셨다. (눅19:28)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경험하면 경험할수록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가 당연하다고 여기지는 않은가?
마치, 내가 받을 만해서 그 은혜를 누린다고생각하지 않은가?
혹, 내가 예상했던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낙심하거나 불평하지는 않은가?
사실, 나는 은혜 받을 자격 없는 존재였는데,
허물과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였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아무리 작은 은혜도
내가 가진 잔에는 넘칩니다.
하나님이 내게 베푸시는 아무리 작은 간섭하심도
내게는 감당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유하여 주심에
나는 오늘도 감격속에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