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것이 인간이구나

내가 무엇이 되어야 겠다는 다짐을 하고
그때마다 나는 낙심과 실패를 경험해야만 했다.
실수할 때마다 정말 나는 스스로를 부정하고 싶어졌다.
아. 이것이 인간이구나.
아. 이것이 나란 존재이구나.
사실을 직면할 때마다 나란 존재에 대해 낙망하게 되었다.
이렇듯?내 다짐은 너무나 연약했다.
누군가에게 나를 따라 걷기를 청했다가 내가 넘어지면 모두가 실족하게 될것이다.
나는 그 말과 행동에?책임져야 한다.
그것이 얼마나 두렵고?떨리는 일인지 모른다.
나만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몸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다만 내가 바라보는 주님을 함께 바랄 것을 청해야 한다.

무너지는 내 마음을 다잡는다.
넘어지고 깨어지면 그 연약함을?사람을 이해하는 척도로 삼는다.
나는 나를 믿지 않는다. 사람을 믿지 않는다.
다만 사랑할 뿐이다.
이런 내가 하나님?곁에 설 수 있는 것은?오직 은혜로 밖에 설명할 수 없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가야 할 길을 내가 너에게 지시하고 가르쳐 주마.
너를 눈 여겨보며 너의 조언자가 되어 주겠다” (시32:8/새번역)

주님,?걸어 갈 길을 가르쳐 주세요.
하지만, 가르쳐 주신 데로 걸어가게 도와주세요..
주님 없는 길이 나를 흥겹게 할 것 같지만
시간이 흐르면 쭉정이와 같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빈 자리만 남습니다. 허기입니다.
비록 주님이 지시하고 가르치신 길에

답이 보이지 않아도?그 앞에 성실하게 걷고 싶습니다.
나를 향한 주님의 성실한 사랑.
마치 내게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시는 그 신실하심.
나도 주님을 따라 그렇게 걷고 싶습니다.
당신의 백성들이 그 길을 따라 걷도록 인도해주세요.

인생은 만화

인생은 만화 같단 생각을 했다.
실사라는 점에서는 만화 보다는 연극과 닮았다.

인생은 연극과 닮았다.

웃고 울어도, 땀 흘려도 그 이면이라는게 있다.
하지만 가짜 울음이 아니다.
가짜 수고가 아니다.

연극이라고 리허설처럼 대하면
아무것도 아닌게 된다. 맹탕이 된다.

골로새교회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며 간구합니다.
기도하기와 구하기를 그치지 않는다는 표현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지구상에 얼마나 될까요?
바울은 또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14:18)
과연 평생동안 기도의 분량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내가 알지 못하는 영역입니다.
하지만 기도만이 기도를 가르칩니다.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을 위해
그치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하기 위함입니다. (골1:9)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아는 목적이 있습니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행하여’로 번역된 헬라어는 부정사로써, 앞서 기도한 목적을 말합니다.
골로새 교인들이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가득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주님께 합당하게 행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뜻을 가지시고, 그것을 이루어 가십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면
우리는 주님께 합당하게 행동해야만 합니다.

쉽지 않은 마음

마음이 쉽지 않았습니다.
이것 저것을 한다고 뛰어다니지만,
그 중에 많은 부분은 사실 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입니다.
하지만 그 일을 했을 때 생겨날 수 있는 파급효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께 돌아오는 것,
정확하게 이것이 효과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일들을 통해 주님의 마음이 전해질 수 있다고
혼자서는 개인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삶에 대해 사람들은 과연 이해할까?
이해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다만 곡해하는 사람들의 글을 보고
나는 마음이 쉽지 않습니다.
그때마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냥 노출되지 않은 삶,
신경쓰지 않고 그냥 살아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게 아니라면, 내가 보여주고 싶은 부분,
사람들을 자극하지 않는 한에서만 보여주면 어떨까?

그러다가 이내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비판을 하고, 정죄를 하는 화살은
주님께서 책임지실 것입니다.
이 말은 내가 죄없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심판하시고 판단하실 분은 주님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의 사역에 수많은 비판과 판단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서신서들을 살피면 금세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라는 말로
서신서의 앞부분을 장식하고 있는데
이는 제자라는 말자체만으로도 많은 비판을 받았다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나는 두렵습니다.
내가 탄 배가 좌초할까 두려운 것 이상으로,
내가 걸어온 길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질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더욱 쉬운 선택을 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내 삶을 붙들어주세요.

나는 꼭 해야 할 것들이 많다

11월까지 마무리해야 할 글이 있다.
약속이자, 사명감으로 책상앞에 앉아야 하는데
나는 우선 마음에 있는 것부터 풀어놓아야
그 다음 일을 할 수 있는 성격인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늘 일과 시간에 부딪힌다.

시간이 부족해.
라는 말은 자기경영을 하지 못하는 사람의 변명이라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나는 꼭 해야 할 일들이 있다.
사명감을 위해 뛰다 보면,
돌보아야 할 우리 아이들이 뒷전이 된다.
그래서는 안된다는 절박감이 있다.
내가 아이들을 잘 돌봐주는 자상한 아빠는 아니지만,
어제는 잠자리에 누운 온유의 수다를 가만히 들어주었다.

“온유야, 어제 유치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니?”
유치원에서 돌아온 온유를 붙들고
내가 궁금한 딸의 일상을 물어보아도
딸은 내 질문에 단답으로 끝나버릴때가 많다.
하지만 어느 때는 자야 할 시간이 지났는데도
끝없는 이야기를 풀어 놓을 때가 많다.
나는 진정시키고 아이를 재워야 할 것인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 아이의 생각을 들여다 볼 수 있을까?
그 무한한 상상력을 엿볼 수 있을까?

내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은 다르다.
그래서인지 꼭 해야 할 일들이 자꾸만 늘어만 간다.
내게는 정말로 시간이 부족하다.
잠을 줄여서라도 나는 꼭 해야만 하는 일을 하고 말 것이다!!
주님 도와주세요.

바쁜 하루,

오늘도 새벽 두시 반,
무척 피곤하지만 감사한 일이 많다.
바쁜 일들을 해나가지만, 아프리카에 우물 만드는 일도
조금씩 진행중이다.
아직 누구에게도 이 일에 대해 후원을 요청하지 않았지만
혼자서 조금씩 해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아내가 피곤해서 낮잠을 자려다가
내가 너무 고생하는 것 같아서 그러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피곤하면 눈을 붙이면 되지. 하고 웃었다.
정말이다. 나는 내가 피곤하다고 아내와 가족들이 함께 피곤한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야 나도 언젠가 편히 쉴 수 있지 않을까? 하하.

작업 스케줄을 하나 둘 종이에 적어나갔다.
12월중에 모두 마쳐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22가지의 프로젝트와 해야 할 일이 ?한 꺼번에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당혹스러웠다.
몇 가지를 포기했어야 하는 걸까?

원고도 써야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진도가 안나가고 있어 큰일이다.
그래도 네팔 캘린더는 이제 작업의 중반을 마쳤다.
투웬티 프로젝트는 이제 액자를 찾으러 가면 된다.
곧 여명학교 졸업사진도 찍어야 하는데, 먼저 말도 못 꺼내겠다.
여러 가지 일을 함께 진행하느라 컴퓨터 세팅도 자꾸만 늦어지고 있다.

저녁에 살짝 부담감과 함께 짜증이 있었다.
서둘러 마음을 살피긴 했지만
할 일 때문에 내 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않기를.
주님 도와주세요.

이런 시간

모든 잠든 밤,?두 시가 지나서야 이제 잠자리에 누우려 합니다.
더 버티려다가 내일 아침 일찍부터 해야 할 일이 많아서
그나마 일찍 접었습니다.
마음 한편에 밀려가고 처리하지 못하는 일들에 대한
고민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녁에 아이들과 잠시 시간을 가졌습니다

숨바꼭질 아주 잠깐, 무궁화 꽃이 아주 잠깐,
레슬링 여러번,,,

하지 않으면 안 될 일들에 대한 압박이 있지만
그렇다고 아이들과 보내는 잠시의 시간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흘려 보내면
그 시간들이 쌓이면 안타깝게 후회할 것 같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지나가고 가장 아쉬울 것들을
지금은 무엇인지 알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막연하지만 이런 저런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고 도리어 내게 행복이 피어납니다,
말씀을 짧게 읽고 눈을 감으면 스르르 잠들겠지요

할 일들..
주님 주신 은혜의 경험들.. 감사합니다
그 신뢰가 오늘을 순종하게 합니다

컴퓨터 리빌딩

컴퓨터가 한동안 블루스크린이 뜨는 등
잦은 고장으로 작업이 이어지질 않았는데
친한 후배와 친구의 도움으로 어젯밤에 컴퓨터 세팅을 마쳤다.
데이터를 백업하며 새벽 3시까지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내 주변에 이런 사랑스런 친구들이 있다는게 새삼 감사하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생각보다 사교적이지 않다.
카톡에는 이천오백명이 넘는 사람들이 등록되어 있지만
일년동안 연락을 주고 받는 사람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내가 만나서 도와주고, 기도하는 사람들도
일시적인 만남에 그칠 뿐이다.
지속적인 연락은 도리어 생색내는 모습으로 보일까봐
지레 걱정하는 성격때문이기도 하다.

이렇게 좁은 바운더리 안에서
시간을 두고 연락을 주고 받고
도움을 주고 받는 사람들.
하나님이 내게 붙여주신 사람들이다.

기존에 내가 작업해 놓은 과정까지
다 백업이 되면 좋으련만,
거기까지는 무리라서 정상적인 작업을 하기까지는
또 한동안 신경써야 할 것 같다.
감사하다. 매 번. 일상들이.

오늘은 잔칫날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그것을 읽기 좋게 정리해서 가까운 지인들에게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잠언으로 묵상을 시작하자, 이 일을 계속해 나가기가 곤란해졌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주제를 따라 흘러간다기 보다는
각각의 개별적인 해석과 같은 내용이 반복되고 있어서
한 절, 한 절의 말씀을 개인이 고개 끄덕이며 묵상하면 될 일이라서
거기에 대해 부연하는 것이 의미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제 지인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기도와 성경 말씀을 함께 나누는 것이
자신의 고된 삶에 단단한 갑옷과 무기가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다시 말씀을 나눠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잠언은 지혜로운자, 그렇지 않는자,
지혜를 찾는 자, 어리석은 자를 대조하며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은 고난 받는 자는 다 불행하고,
마음이 기쁜 사람은 매일이 잔칫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잠15:15)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절반은 불행한 자일까요?
주변에 있는 귀한 사역자들은 대부분 불행한 자일까요?
성경의 한 편에서는 그리스도로 인해 고난 받는 자는 도리어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고난과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고난을 구분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이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고난 받는 자가 지칭하는 것은
바로 앞에서 이야기하는 마음이 상한 자, 어리석은 사람이
감당하는 고난을 지칭합니다.

마음이 기쁜 사람과 고난 당하는 사람의
구체적인 예를 다음 구절들에서 이야기합니다.
“재물이 부족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큰 재물 때문에 고민하며 사는 것보다 낫다.
사랑이 있는 곳에서 풀을 먹으며 사는 것이
서로 미워하면서 살진 송아지를 먹는 것보다 낫다.” (잠15:16,17)
세상의 잣대에는 재물이 부족한 것, 풀을 먹으며 사는 것이 고난이지만
성경은 도리어 큰 재물이 있지만 고민하며 사는 사람,
살진 송아지를 먹지만 서로 미워하는 사람을 고난 당한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외국에서 무척 마음이 상한 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주님은 내게 ‘나로 인하여 기뻐하라.’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낙심한 마음과 바뀌지 않은 상황속에서
나는 그 명령에 순종해서 기뻐했습니다.
그것은 기뻐하는 감정과 구분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내 마음에, 내 영혼에 명령했습니다.
“내 영혼아 기뻐하라, 주 여호와로 인하여 내 영혼은 기뻐하라.”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지옥과 멸망도 여호와 앞에서 드러나는데
하물며 사람의 마음이야 더욱 그렇지 않겠느냐?” (잠15:11)
누가 내 마음을 알까?
우리는 자주 아파할 때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아신다. 고 말씀하십니다.
죽은 영혼들이나 가는 지옥(스올)도
죽음의 자리와도 같은 멸망(아바돈)도
우리에게는 미지의 영역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영역을 넘어선 그 공간이 주님앞에는 훤히 드러납니다.
하물며 사람의 마음이야 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주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할 것을,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소리내어 즐겁게 노래하며 찬송할지어다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주하는 자는 다 외칠지어다
여호와 앞에서 큰 물은 박수할지어다.
산악이 함께 즐겁게 노래할지어다” (시98:4,7-8)

 

그곳이 어디인들

지인의 결혼식 때문에
대구에 다녀왔다.

오랜시간동안 공동체를 위해 충성하느라
자신의 것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귀한 영혼,
마흔이 넘어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이룬다.
그 소중함을 알기 때문일까?
지방에 떨어져 살던 사람들이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많이도 찾아와서 축하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워 보였는지 모른다.

결혼식을 마치고 카페에 모여 나눈 대화들,
나는 아이들을 돌보고 있는데
자매들이 아내 명경에게 질문공세가 이어졌다.
아내는 갑작스런 질문에 이런 저런 대답을 했고
시간이 지나 대화에 합류했는데
많은 도움과 도전과 힘이 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아내가 내게 어리둥절하다며 이야기했다.
내가 아내에게 해준 대답은
“너의 말이 특별히 대단한 것이 아니라
너가 삶을 살았기에 너의 말에 힘이 실리는거다. ”
라고 이야기했다.

모두들 알고 있지만 그렇게 살지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간 흔적은
길을 만들고
걸어간 길은 또 다른 누군가가 따라가기 마련이다.
길이 아닌것처럼 잡초가 무성한 이유는
아무도 갈만한 길이라고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매번 길을 걸을 때마다
과연 걸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긴다.
하지만 막상 방을 내딪으면
그때서야 알게 된다.
안전해 보이는 길만이 길이 아니라
믿음의 도약을 내딪었을 때
그 길은

…..

기도모임이 이어졌다.
많은 사람이 주체하지 못할 만큼 울었다.
아버지의 사랑이 그렇게 만들었다.

알고 있었지만,
기쁜 것은
우리가 모이려고 했던 카페에 자리가 없어서
누군가의 아늑한 집에 모였고
자연스레 말씀과 기도가 이어졌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우연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 그리고 그 길을 걷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마련하신 자리이다.

모든 시간속에 아버지의 뜻이 녹아져 있다면
카페 어느 한 구석에서도
나는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리라.
그 곳이 어디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