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 없는 양

나는 자주 고통하며 두려워 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몸을 뒤척이다 잠을 깨곤 한다.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면 ..’ 으로 시작하신
주님의 약속위에?서서 살아보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내일을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이 주는 두려움은?자주 나를 압도했다.
어쩌면 내가 만난 아픈 사람들과 절망스런 풍경들이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내 마음에 스며 들었던 것 같다.
주님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고 고백하지만
희망을 찾아 보기 힘든 풍경에서 과연 위로를 말할 수 있을까?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약간의 역전과 우연들이 겹치지만
현실에서는 냉혹함과 쓸쓸함이 남을 뿐이다.

그런데, 이 아프고 절망스런 풍경에서
주님의 마음을 생각해본적이 있는가?
맹인과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시고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늘나라 복음을 전하시고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 주셨다. (마9:35)

하지만 다 돌보지 못할 만큼
당신의 백성은 아파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마음이 급하셨다.
추수할 주인이신 하나님께 추수할 들판으로
일꾼을 보내 달라고 기도할 것을 제자들에게 요청했다.
왜냐하면 당신의 백성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고생하며 기진하였기 때문이다.
이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은 창자가 뒤흔들릴 정도로
고통하시며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부탁하신 그 제목은
다음 장면에서 바로 성취되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다. (마10:1)
기도하고 곧바로 성취된다는 말은
당신의 백성을 향한 주님의 갈망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준다.

주님은 아픔이 있는 곳마다 두루 다니시고
돌보셨을 뿐 아니라
일꾼을 위해 기도하라 말씀하시고는
스스로 당신의 제자들을 일꾼으로 보내셨다.
이 급박한 전개속에
주님의 마음이 녹아져 있다.
나는 절망, 나를 불확실성이 아니라
주님의 시선에 나를 고정해야 한다.
그것이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리라..

 

이 마음을 주님께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할 때
가끔 이런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왜 내 마음은 들여다 볼 생각을 하지 않지?’
사람들에게 사과를 하고,
기운 빠진 사람을 위로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려 하다가
문득 기운 빠진 내 마음을 보게 되었다.

똑같이 평범한 사람이고
나는 누구보다 아픈 마음인데
사람들은 내 마음은 천하무적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서운하고 섭섭한 마음이 생길 때면
이 마음 주님께 올려드린다.
주님이 갚아주실 것이니까.
내가 다른 무엇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지만
이 마음을 주님께 온전하게 올려드리며
나의 구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우와

비 오는 날, 우동을 끓여 먹었습니다.
식사를 하기 위해 상을 펴면
소명이가 맨 먼저 아기 의자에 앉아 음식을 기다립니다.
냄비에 우동 하나 내려 놓으면
소명이는 “우와” 하며 좋아합니다.

우와 소리를 듣는데
아내가 내게 말합니다.
“우와. 소리를 들으면 내가 너무 미안해지는 것 있지?
내가 해주는 건 그냥 밥 위에 멸치 얹어주거나,
파프리카 하나 주는건데.
다른 엄마들은 얼마나 아이들에게 잘해주는데
나는 고작 이걸 내주는데
우와. 소리를 들을 때면 참 미안하고 아이들에게 고맙고 그런다?”

우와. 소리를 듣게 되면
좀 더 아이들에게 잘해야겠다. 는 다짐을 하게 된다.

늦지 않은 때에

그때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마7:23)

그들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귀신을 쫓고, 많은 기적을 일을켰던 사람들이다.
예수님과 상관없었던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평생을 살았을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은 무엇인가 잘못 되었다.
하지만 사역을 할 당시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는 ‘그 때’는 종말의 어느 날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셨거나, 아니면 인생을 마친후 심판대 앞에 섰을 때다.
그때 주님이 모른다고 하시면
너무 늦다. 돌이키지 못할 때 그것을 알지 못하면 너무 늦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막연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귀와 치유, 권능을 일으킬 수 있지만
이런 ‘위대한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있다.
사람들이 주목하는 표면적인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판단의 근거이며
무엇보다 판단하시는 분은 예수님 당신이시다.
예수님이 주목하신 것은
주님의 하시는 말을 듣고 행하는 자이다. (마7:24)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이다. (마7:21)

나는 지속적으로 지혜를 구한다. 구해야 한다.
지혜는 무엇인가?
분별해야 할 때에, 이 길인가? 저 길인가?
고민하고 선택해야 할 인생의 모든 시점에서
주님의 마음을 따라서
선택하는 것이 지혜의 한 형태라고 생각한다.
성경속에 수많은 사람들
요셉과 다윗과 다니엘의 선택들..

평화의 시간에는 알 수 없지만
싸움이 격렬한 시간에는 그 선택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비가 내리고 그 비가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세차게 내리칠 때
비로소 그 선택과 믿음의 경중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나는 지혜를 구해야 한다.
주님의 하시는 말을 듣고 행할 수 있는 자가 되기 위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되기 위해.

율법을 완전케 하신 주님

하나님 나라의 법은
결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이 제시하는 율법에 비해
그 턱이 낮지 않다.

은혜의 주님이라고 할 때
그 벽이 낮아서
모든 율법의 조항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 한다고 말씀하신다. (마5:17)

전에는 살인한 사람에 대한 심판을
이야기했다면
마음에 품은 미움까지 이야기하며,
말로써 원망하고 모욕하는 사람들을
지옥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 말한다.
우리 중에 누가 주님 앞에 설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 법은 은혜의 법이다.
전에는 각각의 율법의 조항을 따라
그 테두리를 넘어가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면
이제는 율법의 조항이 아니라
주님을 왕으로 마음에 초대하는 것이다.
마음에 주님이 계시다면
미움과 투쟁은 어떻게든 처리해야 할 문제가 되는 것이다.

주님이 제시하는 마음의 법 앞에
과연 나는 온전할 수 있는가?
그렇게 하지 못해서 나는
가난한 내 마음을 찢으며 애통해 한다.
주님은 그 마음을 향해 복되다! 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법 앞에 당당히 설 자가 있겠는가?
다만 그 분께 기대어 울 뿐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죄를 짓는 것

오늘 새신자 양육시간에 다룰 주제는
‘그리스도인으로 죄를 짓는 것’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지만
또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징계하십니다.
정죄함과 징계는 확연히 다른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징계의 목적은 우리로 회개하여 온전하게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

새신자는 하나님의 징계하심에 대해 내게 질문했습니다.
‘이런 식이면 우리의 모든?나쁜?열매는?죄를 지은 결과로 밖에 해석할 수 없기에
자신은 하나님의 심판은 사후에만 있다고 믿고 싶다’고 했습니다.
나는 질문한 것에 대해 격려해주었습니다.
질문에 대해서 내가 답해주지 않더라도
주님은 누군가를 통해 말씀해주실것을 믿습니다.

물론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징계는 사후에 있겠지만
그것은 징계라기 보다는 심판이라는 말이 더 정확하다고 답해주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자든, 믿지 않는 자이건 성경은 모든 자가 하나님의 심판대앞에 선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의 삶 가운데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모든 나쁜?일들,
예를 들면?모든 중병이나 사고를?하나님의 징계하심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새신자의 생각했던 것처럼?전혀?관계없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 징계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구약의 수많은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모든 사고와 질병을 하나님의 징계하심으로 볼 수 없다는 이유를
우리는 욥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 나머지를 열왕들에 대한 기사나,
사울왕, 또는 다윗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살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느 한 쪽을 일반화 하는데 있습니다.

빛으로 오신 하나님 나라

신학?대학원에 입학하면서
처음 신청한 선택과목이 ‘하나님의 나라‘였다.
이 주제가 무엇을 말하는지 전혀 감도 잡지 못한?상태에서
성경속에 드러나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시간을 통해
마태복음에서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4:17)
는 뜻이 장소적인 접근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경외심에 대한 무게 때문에
하늘이라는 말로 대신 사용하였다.
그래서 다른 복음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 말은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의미이며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는 말은 이제 왕이 이 땅에 오셨다는 말이다.
앞서 세례요한이 선언했던 것처럼
성경에서 예언했던 그 분이
이제 이 땅에 오셨고, 어둠 가운데 있던 땅에 빛이 임했다.
빛으로의 그 분의 사역 앞에
거치는 모든 것들은 회개해야만 한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인해
병원이나 치료 방법이 없던 당시 고대인들에게
병이 치유되는 것을 포함한 놀라운 구원의 소식이 울려퍼졌다.
하지만 동시에 굳어져서 회개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심판의 메세지이기도 했다.

예수님이 사람들의 모든 질병과 아픈 곳을 고쳐 주었을 때
그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져서
사람들은 병을 앓는 모든 사람들을 예수께 데리고 왔다.
온갖 질병과 고통으로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
귀신 들린 사람들, 간질병에 걸린 사람들, 중풍에 걸린 사람들..
지금의 현대 의학으로도 치유하지 못할 사람이라도
예수님께 나아오면 치유 받았다.
그 분께 나아오는 모든 이들은 구원을 받았다. (마4:23-24)

하지만 여전히 고통하고 아픈 사람들,
여전히 남은 고통들이 있다.
사단이 광야에서 시험하고 있는 것 처럼
예수님은 당장에 모든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고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할 수 있다.
그럼으로 모든 사람들을 부요케 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쉬운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신다.
세상의 유혹과 육신의 만족을 채우기 위해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아니라
어둠 가운데 빛을 가져오기 위해 오셨다.
빛으로의 놀라운 사역은 마태복음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보게 될 것이다.

놀라운 이름

마태복음은
정혼녀의 임신으로 인해
고민하고 있는 요셉에게 찾아온
주의 천사를 이야기합니다.
또 다른 성경, 누가복음에서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 마리아에게
임신할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주의 천사를 만날 수 있습니다.

나는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릅니다.
한쪽에게만 이 놀라운 사실을 고지하게 되면
아주 당혹스러운 일들이 생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들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한계너머의 것입니다.
주님의 신비를 공유해야 하는 부부에게
공평하게 들려주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뻤는지요.

앞으로 이들 부부는 헤롯의 박해등
여러 고난을 경험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뜻과 계획안에 있다는 사실은
많은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이후로 특별한 기적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주님의 신비를 품고 살아가는 기쁨이 있습니다.
주의 천사는 요셉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알려줍니다.
‘그 분은 당신의 백성을 죄로부터 구원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누가 죄인인지 범위를 설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얼마만큼의 죄를 탕감받았는지 자신의 죄를 직면해 본 사람이라면
나를 위해 오신 예수님을 경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는 또 하나의 이름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의 임마누엘입니다.

이 놀라운 이름은 마태복음 전체를 감싸고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이 말씀을
원어로는 정확하게 같은 구조로 마지막에 한 번 더 반복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 세상 끝 날까지 자신의 백성과 함께
계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마28:20)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지상해서 해야 할 놀라운 일은
우리를 통해 이루시길 원하십니다.
말이 되는 소리인가요?
하지만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위태한 인생

쉽지 않은 인생이다.
내 마음은 아무것도 아닌 일에
이리 저리 부닥치고
아파하는 자신을 보며 또 한 번 한숨쉰다.

‘나는 언제쯤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이지만
나는 매일 이렇게 질문하고 있다.

위태한 인생속에
아파하며 의심하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남다를 것 없는 평범한 인생이기에
그것이 감사하다.
내가 누군가와 비교하여 단단한 영혼이라면
무엇을 도전할 수 없겠지만
나는 누구보다 흔들리며 아파하는 영혼이기도 하다.

한없이 울던 밤에
그래서 완고해져 있는 어느날 밤에
주님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위로를 하셨다.
그러면서 주님에 대해 조금 알게 되었다.
나의 약함을 통해 일하시는 주님.
이리 저리 부닥치고
아파하며 주님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주님은 매일처럼 말씀하신다.

주님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관성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드릴때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법칙이 아니라
특별한 은혜임을 깨닫게 하신다.
그 사랑은 전혀 자연스럽거나 낭만적인 사랑이 아니다.
고통스러운 사랑이며, 긍정할 수 없는 사랑이다.
나는 그 사랑을 생각하며 매일 울어야 하는
그런 사랑이다.

주의 뜻이면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약4:15)
우리는 보석과 같은 존재이지만
한편에선 안개와 같은 존재이다.

나는 무엇을 쫓고 있는가?
여러 가지 결정들,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 알지 못해서
고민하고 있다.

주의 뜻이면.
이란 말은 곧, 주님의 은혜로 살고 있는 안개와 같은 존재입니다.
라는 고백이 아닐까.